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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창작, 그 틈을 메우는 해석

중앙선데이 2015.03.28 15:18 420호 14면 지면보기
보르헤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형이상학적인 작가’ ‘미로의 작가’ ‘모더니즘 문학의 탈출구’ 등으로 불린다. 대표작이 『픽션들』이다. 이 책은 1941년 출간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하 오솔길들)과 44년에 추가한 ‘기교들’로 나뉘어 있다. ‘오솔길들’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있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2> 보르헤스의 미로형 글쓰기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이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이 너무나 유명한 서문은 짧게 써도 다 말할 수 있는데, 길게 쓰는 것은 무식한 방법이라며 장편을 공격한 것처럼 축약되어 퍼져 왔다.

그런데 원문을 제대로 읽어 보면 장편에 대해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상은 자신의 글쓰기를 합리화하는 선언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다. 이 짧은 소설은 메나르의 작품 목록을 일별한 후 그가 남긴 미완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메나르가 쓰려고 했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다른 것이 아니라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모든 단어와 모든 행이 완전히 일치하는 몇 페이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이 작품에 대해 논평을 가하기 시작한다.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글자 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작품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보다 거의 무한할 정도로 풍요롭다.”

어떻게 똑같은 문장으로 쓰인 작품을 표절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풍요롭다고 예찬할 수 있을까? 세르반테스의 문장은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며 절하하고, 메나르의 똑같은 문장을 두고는 “이런 생각은 어머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라고 극찬할 수 있을까?

글에 허구를 섞으며 기자에서 작가로
이 소설은 이야기의 재미가 아니라 생각의 재미를 안겨준다. 화가 마르셀 뒤샹의 세계를 떠올려 볼 수도 있다. 뒤샹은 화장실에 걸린 변기도 미술관에 걸리면 예술품이 된다고 생각했다. ‘샘(fountain)’이라는 그럴듯한 제목도 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해석의 방식이지 작품의 수준이 아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개념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예술가가 비평가이자 독자가 되는 방식을 통해 보르헤스는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당시 보르헤스는 일간지 ‘크리티카’의 토요일자 문학섹션 주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격주로 지면에 글을 썼는데, 주로 신간 서평이나 외국 작가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본격적인 소설 쓰기를 고민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을 그대로 활용해 보기로 했다. 그는 영어권 신간의 내용을 스페인어로 요약하면서 첨삭을 가했다. 처음에는 출전을 명백히 밝혔지만 나중에는 이를 귀찮아 하거나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사실에 얽매이기보다는 기존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핵심을 전파할 수 있는 허구를 뒤섞어 버리거나 비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자에서 작가로 건너가는 순간이 됐다. 실존하지 않는 피에르 메나르라는 인물을 만들어 그가 20세기에 『돈키호테』를 새롭게 썼다고 우겨대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당신도 보르헤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원문의 내용을 번역하거나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에 있지 않다. 원문의 긴 문장은 방해가 될 따름이다.

영화 ‘장미의이름’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오마주
『픽션들』의 비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교들’에 수록된 작품의 공통점은 불면증이다. “두 편에 대해서는 아마도 조금 자세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다. 바로 ‘죽음과 나침반’과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대해서다. 두 번째 작품은 불면에 대한 긴 메타포다.”

기교들의 서문에 실린 이 언급은 보르헤스에게 불면증이 찾아온 35년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밤은 거대한 나팔이 되어 그의 귓가를 맴돌았고, 설상가상으로 치통이 찾아오면서 누울 수가 없을 지경이 됐다. 그의 머리에는 동네 골목골목의 세세한 정경과 호텔 창문 밖 정원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어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서 읽었던 부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40년에 쓴 시 ‘순환하는 밤’은 불면과 치통에 시달리던 보르헤스의 헛소리 같다. “켄타우로스는 미래의 통말발굽으로 / 파피테스 족의 가슴을 짓밟으리. / 로마가 티끌로 화할 때, 미노타우로스는 / 악취 풍기는 그의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

“악취 풍기는 그의 궁전 속에서 무한한 밤을 신음하리라”는 불면증과 치통을 경험해 보았다면 한 번쯤 떠올려 볼 수 있는 문장이다. 이 고통 속에 무한히 기억하는 탐정의 이야기와 푸네스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다만 켄타우로스, 피파테스, 미노타우르스를 적절히 인용할 줄 알려면 책도 꽤 많이 읽었어야 하고, 적절한 언어 조합의 능력도 갖출 필요가 있다. 보르헤스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와 카프카의 『변신』을 번역한 역자였고, 46년 독재자 페론 정권에 의해 잘리기 전까지 도서관 사서였다. 55년 페론의 몰락으로 인해 그는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되어 도서관으로 회귀한다.

이 모습은 하나의 상징이 됐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보르헤스를 부활시킨다. 젊은 수도사들이 의문사를 당한다. 윌리엄 수도사와 젊은 수사 아드소가 수도원의 비밀을 파헤친다. 공통점은 이들이 웃음의 비밀을 예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을 탐독했다는 것이었다. 장님 수도사 호르헤가 책장에 독을 발라 놨다. 이 책은 웃음을 예찬하는 신성모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호르헤는 보르헤스의 이름을 빌려온 존경의 표시인 동시에 수도원의 책에 묻혀 자신만의 벽을 쌓은 고집스러운 노인으로 형상화된 비판이기도 하다. 책들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는 말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에 앉아 이 책과 저 책을 인용하고 뒤섞으며 짧은 글을 썼을 따름이다. 다만, 에코·푸코·존 바스 등 후대의 독자와 주석가들이 이런저런 ‘설’을 추구하며 해석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것이야말로 보르헤스의 핵심이다.

그가 원한 것은 서가의 한 칸을 채울 수 있는 책의 볼륨이었다. 될 수 있다면 이 볼륨을 작게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독자와 비평가들이 상상과 해석의 볼륨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보르헤스의 작지만 무한한 미로는 그렇게 이어져 왔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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