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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신의 창극 실험 가능성 보여준 절반의 성공

중앙선데이 2015.03.28 15:51 420호 30면 지면보기
재일 연출가 정의신과 국립창극단의 만남. 사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에서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까지, 한태숙의 ‘장화홍련’에서 고선웅의 ‘변강쇠 점찍고 옹녀’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명 연출가들을 적극 기용해 창극의 새로운 형식을 찾는 실험에 매진중인 국립창극단이 한국적 뿌리와 이방인으로서 객관적 시각을 겸비한 스타 연출가 정의신을 놓칠 리 없는 것이다. 창극단의 또 다른 실험에 대한 높은 기대감으로 개막전 전석매진, 추가회차 오픈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국립창극단 ‘코카서스의 백묵원’ 2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문제는 과연 ‘눈물과 웃음이 하나 되는 정의신표 마법이 창극에서도 통했는가’다. ‘야끼니꾸 드래곤’(2008)에서 ‘노래하는 샤일록’(2014)까지, 정의신의 무대에는 늘 특별한 것이 있었다.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 가장 큰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것. 문자 그대로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나는’ 황당한 경험을 겪게 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한발짝 떨어져 보면 희극이기에, 희극과 비극은 등을 맞대고 있는 한몸이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인생철학과 연극미학 때문이다.

어렵게 삶을 헤쳐가는 서민들이 시련의 순간조차 한바탕 웃음의 씻김굿으로 넘어서는 그의 휴머니즘은 사실 우리 판소리와 맞닿아 있다. 스토리라인과 별 상관없는 온갖 에두른 재담으로 혼을 쏙 빼놓고 묵직한 감동과 교훈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민중극 아니던가. 더구나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이다. 젊은 소리꾼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사천가’ ‘억척가’가 이미 글로벌 히트를 기록했으니, 브레히트와 창극의 찰떡궁합도 이미 검증받은 셈이다.

원작은 2차 대전 후 코카서스의 두 집단농장이 벌이는 비옥한 계곡의 소유권 다툼으로 시작해 극중극 백묵원의 전설로 이어진다. 성경 속 솔로몬의 재판 또는 판관 포청천의 재판에서 모티브를 따온 탐욕스런 귀족과 가난한 민중의 친자확인소송(?)이 그것. 사회주의자이자 계몽주의자였던 브레히트가 이상사회에 대한 고민을 모성으로 대변되는 인간성 회복에 빗댄 것이다. 정의신은 이런 배경을 걷어내고 극중극만 살려 전쟁의 비극과 진정한 모성에 확대경을 댔다.

그러나 정의신표 희비극과 창극단원들의 연기 사이엔 미묘한 간극이 있었다.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끌어내야 하는 정의신의 무대는 상당한 연기력을 요구한다. 주인공 한두명에 집중되는 것이 아닌 다같이 만들어가는 집단극인 만큼, 단역이라도 분명한 캐릭터가 있는 살아있는 연기로 객석을 휘어잡아야 소위 ‘마가 뜨지’ 않는다. 배꼽잡는 B급 유머의 향연 뒤 숭고한 결말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정의신의 연극이 그런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창극단원들이 정의신의 시그니처인 ‘삼세번 반복 유머’등 특유의 코드를 진땀나게 소화했지만 객석과는 온도차가 느껴졌다. 밑바닥부터 내공이 다져진 연극배우들이 몸을 던져 이뤄내는 연기신공은 한두달 연습으로 간단히 흉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럼 창극단원들에게 연기력을 요구해야 할까. 오페라 가수를 연기로 평가하지 않듯 소리꾼들은 소리로 평가받아야 한다. 문제는 소리꾼의 장기이자 창극의 존재이유인 속 시원한 소리 한바탕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 소리로 웃기고 울려야 할 소리꾼에게 소리는 실종되고 연기와 노래만 남았으니 존재감도 사라졌다. 작창·작곡을 맡아 “창극에도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 한곡쯤 있게 하겠다”던 김성국 작곡가는 다짐대로 작곡에 매진한 인상이다. 양악기에 국악타악을 더한 14인조 오케스트라는 시종일관 웅장하고 강렬한 사운드로 극적 효과를 넘어선 존재감을 과시했다. 대하사극 OST풍의 선율이 깔리며 남녀 주인공이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나 민요풍 엔딩 대합창 ‘우리는 원을 그리네’는 중독성이 있었고, 비장한 사운드와 함께 연출되는 군중씬은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소리의 멋을 대체하는 성질은 아니었다.

이것이 과연 창극 맞느냐는 논쟁은 부질없다. 창극의 양식미를 찾아가는 실험이 한창인 와중에, 소리꾼의 장기를 살리고 연기는 연기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유레카!’를 외쳐도 좋을 것이다. 정의신과 창극의 만남은 커다란 가능성을 여전히 내포한 채 막을 내렸다. 각자 색깔이 뚜렷한 정의신 스타일과 소리꾼들이 진정한 합을 이룬 재연을 기대한다.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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