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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양치질의 유혹

중앙선데이 2015.03.28 16:06 420호 34면 지면보기
늦은 밤 광역버스는 고요하다. 그런 날이 있다. 피곤해서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날. 책도 스마트폰도 보기 싫고 음악도 듣기 싫고 조용히 창 밖의 어둠만 바라보게 되는 날. 본다기보다 그쪽으로 눈만 두고 멍하니 있는 시간. 다들 그런 시간을 보내는 중인지 버스 안은 조용했다. 버스 안이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옆자리에서 나는 소리 때문이었다. 부스럭. 그 소리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란으로 들렸다. 그건 버스 안이 조용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옆자리 남자가 조심해서이기도 하다. 소심한 움직임은 더 신경 쓰이는 법이다.

나는 안 보려고 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옆자리라 하더라도 사생활을 침범하는 것 같아 안 보려고 애썼다. 대신 나는 상상한다. 남자는 오늘 삼시세끼 중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침엔 커피만 한잔 했고 점심은 회의발표 준비 때문에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었을 뿐이다. 그나마 맛도 모르고 삼켰다. 남자는 열 시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까부터 허기가 졌다. 집에 가서 라면이라도 먹을 생각을 하며 절박한 허기를 달래는 중 옆자리에 앉은 민머리 남자, 그러니까 나를 보자 문득 가방 안에 넣어둔 견과류 봉지가 떠올랐다. 버스 안에서 먹어도 될까. 뭐 어때?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닌데. 소리가 시끄럽지 않을까?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소리가 나면 얼마나 나겠어. 남자는 천천히 가방의 지퍼를 연다.

보지 않고 듣기만 할 때 상상은 거대해진다. 내 머리처럼 생긴 견과류가 남자의 이에 부서지고, 부서진 파편이 남자의 입 속 상피세포에 마구 부딪히고, 그것들이 혀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에 따라 침의 쓰나미와 섞이고, 마침내 식도의 폭포 아래로 떨어진다. 남자는 질소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봉지 속 하루 권장 섭취량의 견과류를 가루까지 먹는다. 다 먹은 빈 봉지를 접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이상 접히지 않을 때까지 접는다. 다 접은 봉지를 남자는 가방 속에 넣는다. 부스럭. 회복탄력성 높은 봉지는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지개를 켠다. 남자는 가방의 지퍼를 열고 그 봉지를 꺼내어 접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남자는 이 건강에 유난히 신경을 쓰는 사람이다. 항상 칫솔과 치약을 휴대하고 다닌다. 식사를 마치면 대개 3분 이내에 양치를 한다. 그에게는 양치질 강박이 있다. 그렇지만 버스 안에서 양치를 할 수는 없다. 남자는 이와 잇몸 사이에 낀 부스러기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이 마구 부풀어올라 이와 잇몸 사이를 들뜨게 하는 것을 느낀다. 이가 흔들리고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다. 남자가 조용히, 느리게 혀 양치를 시작한다. 이 사이에 낀 견과류 껍질이나 부스러기를 남자는 혀와 입의 빨아들이는 힘을 이용해 섬세하고 집요하게 제거하려고 애쓴다. 혀 양치질은 점점 시끄럽고 빨라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우선 내가 편하고 행복해야 다른 이들도 함께 편하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이들이 모두 편하고 행복해야 비로소 나도 편하고 행복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남자와 나는 어느 쪽일까?

나는 참으려고 했다. 당장 남자의 입을 벌리고 그 속에 든 부스러기를 찾아 꺼내주고 싶었지만 참는다. 이럴 때 우리는 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를 알면 화가 조금이라도 풀리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구라는 걸 기억하려고 그래서 다음에는 그 사람 옆에 자리가 있어도 절대로 앉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

남자의 양치가 끝난 모양이다. 버스 안은 고요하다. 고요하다. 너무 고요하다. 그때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소리가. 그 소리는 내 목구멍 안 깊은 곳에서 나는 것 같다. 나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옆자리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나와 너무나 비슷하게 생긴 한 중년 남자의 얼굴을. 그러니까 차창에 비친 나 자신의 얼굴을.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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