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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19> 새벽 4시에 소집된 회의, 제거되는 '린뱌오의 남자들'

중앙일보 2015.03.28 16:58
원수 네룽쩐(왼쪽 첫번째), 허룽(왼쪽 세번째),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는 마오쩌둥과 린뱌오. 1960년 1월 24일, 광저우.



린 사망 13일만에 주변 정리 시작
공군 사령관 우파셴 등 심복 4명
회의장서 무장해제 당한 뒤 구금
저우언라이 "자살은 하지 마라"

린뱌오(林彪·임표) 사망 13일 후인 1971년 9월 24일 새벽 4시, 린뱌오의 측근들은 회의 참석을 통보 받았다. 공군 사령관 우파셴(吳法憲·오법헌)이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회의에 갔다가 제대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집사람을 집무실로 불렀다. 애들 교육을 부탁했다. 열흘 만에 세수를 하고 죽을 한 사발 마셨다. 태연한 척 했지만 별 생각이 다 났다.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인민대회당 입구에서 중앙경위단(8341부대)원들이 수행원의 가방을 압수했다. 경위들은 살벌했다. 회의장 문 앞에 이르자 마오 주석의 명령에 의해 총기를 휴대할 수 없다며 몸수색을 했다. 안경과 만년필도 무기 취급을 당했다. 안락의자와 등나무 의자가 한 열씩 마주보고 있었다. 무장 경위의 안내로 등나무의자에 앉았다. 뒤에 거대한 체구의 경위단원이 서 있었다. 황용셩(黃永勝·황영승)과 리쭤펑(李作鵬·이작붕)은 나보다 늦게 왔다. 먼저 와 있던 치우후이쭤(邱會作·구회작)가 우리를 힐끔 쳐다봤다.”



네 사람이 도착하자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이 베이징 군구 사령관 이더셩(李德勝·이득성)과 함께 나타났다. 베이징 위수사령관과 공안부장 등이 뒤를 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자 저우언라이가 입을 열었다. “네 사람은 린뱌오와 관계가 밀접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은 10일간 토의 끝에 너희들의 모든 직무를 정지시키기로 결정했다.



각자 적당한 곳으로 이동해 그간의 잘못에 대한 조사를 받으며 반성할 시간을 갖도록 해라. 네 사람은 혁명 과정에서 불멸의 공을 세웠다. 조사 받는 동안 모욕을 느끼거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겠다. 가족도 우리가 돌볼 테니 염려하지 마라. 나 저우언라이를 믿어주기 바란다.”



저우언라이는 황용셩에게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함께 전장을 누비던 시절이 그립다. 주석은 너를 신임했다. 어쩌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게 됐는지 답답하다.” 황용셩은 꼿꼿이 앉은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안해진 저우언라이가 이제 가보라며 손짓을 한 후 악수를 청했다. 황용셩이 거절하지 않자 예젠잉과 리더셩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위수 사령관 우충(吳忠·오충)이 황용셩을 데리고 나가자 저우언라이가 우파셴에게 눈길을 줬다. “너는 공군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조사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 옛날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리겠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얘기해라. 다 보내 주라고 지시하겠다.”



문혁 시절 예췬(앞줄 오른쪽 두번째)과 함께 만리장성에 오른 린뱌오의 4대 심복들. 앞줄 왼쪽부터 황용셩, 우파셴, 리쭤펑. 뒷줄 왼쪽이 치우휘이쭤.




우파셴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저우언라이는 씩하고 웃었다. 총리는 내가 먹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젊은 시절, 나는 배가 고플 때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럴 때마다 저우는 찐빵과 국수를 사줬다.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는 돼지고기도 실컷 먹여줬다. 내가 피아노 치며 영어노래 부르면 생긴 것과 딴판이라며 재미있어 했다.”



우파셴이 전쟁터라면 몰라도 감옥에서 죽지는 않겠다고 하자 저우언라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옆에 있던 리쭤펑이 명당 자리나 구해 놓으라고 했을 때는 얼굴을 찡그렸다.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 실각 후 군권을 장악한 린뱌오는 옛 부하들이 아니면 요직에 기용하지 않았다. 이날 체포된 네 사람은 수십년 간 린뱌오 심복 중 심복이었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혁명에 투신해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청년 시절부터 린뱌오의 총애를 받았다.



문혁 초기 황용셩은 광저우(廣州) 군구 사령관이었다. 1967년 1월, 군구 간부들이 들고 일어나자 린뱌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린뱌오는 왕년의 부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당일로 베이징으로 불러 올려 안전한 곳에 보호했다. 광둥(廣東)성 혁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주임 임명장을 쥐어주며 금의환향시켰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황용셩을 신뢰했다. 2개월 후, 총참모장에 기용하겠다는 린뱌오의 제의를 군말 없이 승인했다.



황용셩은 린뱌오 부부에게 감복했다. 숙소에 예췬(葉群·엽군)의 친필인 “지금 세상에는 성현이 없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不信今朝無古賢)”를 걸어놓고 맹세했다. “무슨 상황이 닥치건 린뱌오 부주석에게 충성하겠다.”



우파셴도 린뱌오 부부 덕에 목숨을 건졌다. 문혁 1년 전, 린뱌오는 우파셴을 공군사령관에 중용했다. 문혁이 시작되자 고급 간부들의 수난이 잇달았다. 얻어 맞아 팔 다리가 부러지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간부들이 속출했다. 우파셴이 제지하자 공군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쇠 몽둥이를 들고 사령관실로 몰려갔다.



우파셴은 먹을 것을 싸들고 산 속으로 도망쳤다. 동굴에 숨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굶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공군 말단 부대가 타이완 측의 미제 무인 정찰기를 격추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린뱌오는 예췬을 우파셴 비판 집회장으로 보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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