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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Big Questions'] 사람 생각을 지배하는 뇌, 그 뇌를 지배하는 입

중앙일보 2015.03.28 15:25
테리 길리엄(Terri Gilliam) 감독의 컬트 영화 ‘브라질’의 한 장면 (1985년, 20세기 폭스)



뇌가 다르면 해석도 다르게 마련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각
인간이 느끼는 세상은 다 달라도
언어의 한계에 갇혀 다양성 제한

1.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멤버들로 구성된 영국 최고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깊은 철학과 유치한 몸 개그,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과 초(超)현실주의, 신랄한 풍자와 휴머니즘이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키워드들을 잘 조합한 그들의 쇼는 1969년∼1974년 ‘몬티 파이선의 플라잉 서커스’란 이름으로 영국 BBC에서 방송됐다. 종료된 지 이미 40년이나 지났지만 쇼는 여전히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가장 잘 나간다는 컴퓨터 코딩 언어 ‘파이선’을 개발한 네덜란드 프로그래머 기도 반 로숨(Guido van Rossum)이 자신이 만들어낸 언어에 ‘파이선’이란 명칭을 붙여줬을 정도니 말이다. ‘몬티 파이선’은 직접 연출·제작·출연한 영화들로도 유명하다. 개중엔 예수님 옆집에서 태어난 좀도둑 브라이언의 인생을 그린 ‘브라이언의 삶’도 있다. 이 영화는 브라이언이 예수의 옆 십자가에 매달린 채 부르는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언제나 인생의 아름다운 면만 바라보자)란 노래로도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영화 ‘삶의 의미’에선 우연과 유치함, 그리고 무의미한 걱정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테리 길리엄 감독은 ‘몬티 파이선’의 일원이었다. 그의 1985년 영화 ‘브라질’은 코미디 방식으로 디스토피아(dystopia, 반이상향, 살기 힘든 곳)를 그렸다. 영화가 제작된 시기에 맞게 ‘브라질’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유명 작품 ‘1984’를 풍자한다. 아니 어쩌면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신나는 신세계’의 융합버전일 수도 있다. 오웰의 ‘1984’는 몸의 통제를 통해 마음을 컨트롤하려는, 그리고 헉슬리의 ‘신나는 신세계’는 마음을 유혹해 우리의 몸을 제어하려는 나라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영화 ‘브라질’의 독재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송두리째 장악하려는 백화점식(式) 전체주의에 가깝다.



이미 너무 많은 성형수술 탓에 생긴 ‘부작용에 대한 부작용’을 제거하려고 또다시 성형수술을 시도하는 부자 어머니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 주인공은 반(反)정부 운동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 때문에 혁명가로 몰려 보안국의 표적이 된다(모든 혁명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주인공은 결국 잡힌다. 잔혹한 고문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감옥에 진입한 게릴라 요원들에 의해 구출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독재국가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믿는 순간 이 모든 것은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미쳐버린 주인공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럴 거라고 믿는 순간, 이 역시 갑갑한 직장의 ‘미생’으로 살아야 하는 주인공의 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거울에 비친 모습만 보고 살았던 공주



영국의 화가 존 W.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의 1888년 작품 ‘샬로트의 여인’. 샬로트의 공주는 거울에 비친 세상이 아닌, 자신의 망막에 비친 세상만이 참되다고 착각한다.




2. 영국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거주한다는 카멜롯(Camelot)으로 흐르는 강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작은 성. 낡은 성에 홀로 살고 있는 샬로트의 공주(Lady of Shalott). 무슨 이유 때문일까? 아름다운 공주는 성을 떠날 수도, 창밖을 봐서도 안 된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 아름다운 여름밤의 하늘, 점점 붉어가는 가을 낙엽들, 첫 눈 때문에 차가워진 서로의 손을 녹여주며 사랑을 약속하는 연인들. 샬로트의 공주는 작은 거울에 반사된 모습들만 바라볼 수 있다.



오른손이 왼쪽, 왼쪽 가슴이 오른쪽. 언제나 정반대로만 보이는 그림들을 공주는 낡은 베틀로 베를 짜야만 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연인들은 연인이 아니고 거울에 비친 가을은 가을이 아니다. 거울에 비친 여름은 향기롭지 않으며 거울에 비친 봄은 아무 희망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에 스쳐가는 호수의 기사 랜슬롯.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진정한 사랑? 샬로트의 공주는 결심한다. 그의 얼굴을 봐야만 한다고.



그녀의 운명이었던 베틀을 밀어내고 공주는 뒤 돌아선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저주에 걸린 자신의 실상을 알지만 그래도 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울에 비친 가짜 세상이 아닌, 내 눈, 내 가슴, 내 마음으로 보는 참된 세상 말이다.



눈을 통해 직접 본 세상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일시적이어야 할까? 세상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한 샬로트의 공주는 마치 자아도 의식도 없는 인형같이 보트에 올라탄다. 이미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여인의 몸을 실은 보트는 카멜롯을 향한다. 보트에서 발견된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 랜슬롯은 질문한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누구일까? 감겨진 눈은 뭣을 보며 살았을까? 여인은 왜 이 작은 배를 타게 됐을까?”



타인의 역사가 자신의 역사가 될 수도



3. 한국에서 온 한 소년이 있었다. 너무나 먼 독일 땅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라. 시골학교엔 한국 학생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인 학생들조차 없었다. 소년은 나중에야 그 동안 막연히 모두 독일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프랑스·영국·터키인들이란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당연히 수업이 있어야 할 토요일에 학교에 나갔다가 수위 아저씨의 손짓발짓 설명을 듣고 집에 오기도 했다. 중국인이라며 돌을 던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함께 놀며 친해졌고 과거는 잊혀졌다.



미래는 아름다워 보였고 소년은 자신의 미래가 당연히 독일에 있다고 믿기 시작한다. 칸트·가우스·바흐·마르크스를 숭배했다. 친구 집에서 만난 자상한 할아버지들이 바로 유대인 아이들을 산채로 불태웠던 나치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타인의 역사가 자신의 역사가 됐기에 소년은 타인의 죄를 갚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일 리가 없다고. 자신은 분명 외계인이라고. 외계인 부모들이 은하계 최악의 혹성인 지구에 자신을 던져놓고 떠난 거라고. 그리고 자신이 18살이 되면 다시 데리러 올 거라고. 물론 18살 생일에도 28살 생일에도 38살 생일에도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소년은 청년, 그리고 청년은 아저씨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지구란 작은 세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뇌는 머리 안에 있기에 세상을 모른다



이 옷은 무슨 색깔일까?
4. 이 옷의 색깔은 무엇일까? 평범한 검정, 파란 줄무늬 원피스를 놓고 왜 이리도 난리인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 눈엔 검정·파란색이 다른 사람의 눈엔 금색·하얀색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같은 옷의 색깔을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인가? 뇌는 머리 안에 있기에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다. 수술 받을 때 마취를 하는 것은 두개골을 열기 위해서다.



뇌는 손으로 만져도, 가위도 잘라도 느끼지 못한다. 스스로 세상을 볼 수 없기에 눈·코·귀 같은 센서들이 제공하는 입력 값들을 통해 현실을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오감(五感)은 불안전하다. 신호보다는 잡음이 더 많은, 필연보다는 우연에 더 가까운 불안전한 장치들. 그렇기에 뇌는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대로 세상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뇌가 다르면 새로운 착시 만들어 내



해석과 믿음. 본다는 것은 언제나 해석한다는 말이다. 지각은 믿음이다. 이 글을 읽고 쓰고 있는 우리 둘. 모두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망막에 꽂히는 정보의 대부분은 광자들의 가우스(Gauss) 확률분포들일 뿐이다. 색깔·형태·입체감 모두 뇌의 해석이란 말이다. 세상은 아마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인식하는 순간 세상은 더 이상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 된다.



내가 되지 않은 세상은 내겐 불투명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input’(입력)이 아니라 뇌의 해석을 이미 걸친 ‘output’(출력)이기 때문이다. 뇌가 다르면 해석이 다르다. 어떻게 뇌가 다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면 간단히 경험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신경회로망의 구조와 기능을 바꿔볼 수 있다. 경험·교육·환경·마약·음식·상상·꿈·사랑·희망·좌절·죽음…. 이 모두 우리의 뇌를 바꿔놓을 수 있다. 뇌가 달라지면 새로운 착시(錯視)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착시는 새로운 ‘output’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우리만이 아니다. 개구리는 모든 물체를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들로만 구별한다. 박쥐는 초음파로 세상을 인식한다. 이 세상에 사는 어느 두 사람의 뇌도 100% 같지 않다. 일란성 쌍둥이마저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역시 모두 다르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자신은 외계인이라고 상상하는 세상, 거울에 비친 세상이 아니라 망막에 비친 세상만이 참되다고 착각한 공주의 세상, 혹독한 고문 탓에 죽어가는 뇌의 망상들로 가득한 세상. 인간의 세상은 무한으로 다양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세상에 산다고 믿는 것일까? 바로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기 전 그 상태론 전달할 순 없다. 인식된 세상은 이미 나란 존재의 한 부분이다. 아니, 나란 존재 그 자체가 인식된 세상들의 합(合)집합일 수도 있다. 서로가 다른 세상을 인식하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언제나 언어란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언어의 해상도가 인식의 해상도보다 낮기에 우리는 서로 다르게 보는 세상을 동일한 단어를 써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드레스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신기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같은 드레스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우리는 어쩌면 서로 소통할 수도, 알아볼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나’란 자아들에 갇힌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들일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3000년 전 우주의 본질에 대해 “하나일까 아니면 여러 개일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언어란 불안전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무한으로 다양한 세상을 단 하나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김대식, KAIST 전기 및 전자공학과 교수, 뇌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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