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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와 사람] 초의와 추사, 차로 이어간 평생의 우정

중앙일보 2015.03.28 14:43
『벽해타운첩』에 실린 초의의 친필 글씨. (개인 소장)



<22> 초의선사와 차2
초의, 추사 아우 김명희와도 교유
김명희의 茶詩, 초의 차를 바라밀 경지로 묘사
초의가 차 통해 이룬 궁극의 세계

초의선사(1786~1866)는 조선 후기 승려였다. 사원차를 복원한 그의 가열찬 열정과 노력은 명품 ‘초의차’를 완성했다. 물론 이 명차가 나온 배경엔 그의 차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있었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추사와 신위의 조력 또한 큰 지렛대가 되었다. 이들은 초의가 보낸 차를 받은 후 감사와 신랄한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보면 초의차는 이들의 관심과 애호 속에 명차로서의 가능성을 열어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추사의 예리한 품평과 조언은 초의차 완성에 큰 몫을 담당했다. 조선 후기 명차의 탄생은 동시대에 차를 애호했던 사람들의 관심과 열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울러 초의와 추사 두 사람의 차를 통한 교유는 차를 즐기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그럼 초의와 추사는 어떤 인연으로 만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들은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며 서로의 탁마를 재촉했다. 평생 서로를 위로하고 후원을 아끼지 않는 벗을 만난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 이들의 돈독한 우정이 이어지게 한 매개물은 차다.



일찍이 초의는 자신과 추사와의 관계를 “서로를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못하는 사이(不忘相思相愛之道)”라 정의했다. 추사 또한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이란 두인(頭印)을 사용해 두터운 우정을 드러냈다. 이들의 만남은 조선 후기 유불교유(儒佛交遊)의 백미(白眉)로도 칭송된다.



이들의 우정을 돈독히 해 준 초의차는 어떻게 완성됐을까. 명차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멸된 사원차를 명차로 복원한 초의의 공력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그 내력을 살펴보기로 하자.



초의는 운흥사로 출가한 후 차를 알게 됐을 것이라 짐작된다. 대흥사로 수행처를 옮긴 후 만덕사의 혜장을 통해 차의 의미를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차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차를 좋아했던 다산이 그에게 영향을 끼친 이후일 것이다. 하지만 초의가 차를 만들고, 차 이론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은 추사를 만나고 난 후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의 첫 만남은 1815년 겨울이다. 당시 초의의 첫 상경을 주선한 것은 정학연(1783~1859)이었다. 막상 한양에 도착한 초의는 추운 겨울을 수종사에서 지내야 했다. 정학연을 만나지 못해 초의는 막막했다. 얼마 후 다시 마현으로 돌아 온 정학연이 초의의 거처를 서둘러 학림암으로 옮겨주었는데, 여기서 추사를 만났다. 대흥사로 돌아간 후에도 초의는 추사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듯하다.



1817년 6월 기림사에서 조성하는 천불전의 옥불과 관련하여 경주를 방문했던 초의는 추사가 경주 감영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추사를 기다렸다. '불국사회고(佛國寺懷古)'는 바로 추사와의 해후를 기다리며 쓴 초의의 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래도록 길에서 선생을 생각하며(苦憶先生久在行)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네(紫霞門外看新晴)

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佛國人間寧易得)

서로 만나 편안한 정을 다 할 수 있을까(相邀始可遂閑情)



아마 초의는 당시 추사와 재회를 약속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오래도록 길에서 선생을 생각했다”던 것이다. 뒷발을 돋운 채 불국사의 “자하문 밖”을 바라보며 추사가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러나 무슨 일 때문인지 그렇게 고대하던 해후는 성사되지 않았다. 당시 추사가 경주 무장사비의 단편을 찾은 것은 1817년 4월이었고, 초의는 이 해 6월에 경주에 도착했다.



아무튼 초의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추사를 기다렸던 셈이니 초의의 아쉬움은 상대적으로 컸던 듯하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 추사를 만나 “편안한 정을 다 할 수 있을까”라고 한 것이다. 추사를 향한 초의의 마음은 이처럼 간절했다.



한편 초의가 실제 차 문헌을 연구하며 차 이론을 정립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28년 이후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신전(茶神傳)』 후발에 “무자년(1828) 곡우에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 아자방에 갔다가 『만보전서』를 등초해 다시 정서(正書)하려 했지만 병으로 끝내지 못했다”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당시 그가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 아자방에 갔다’던 연유는 무엇이며 그가 스승이라 말한 이는 누구일까. 필자가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를 집필할 때 초의의 사승관계를 추적하던 끝에 밝혀낸 바 있듯이, 초의가 칠불암에 간 것은 계학(戒學)을 잇기 위함이었고 초의에게 계학을 전해준 이는 도갑사의 금담(金潭·1765~1848)이었다. 초의가 여기서 스승이라 말한 이는 금담이었던 것이다.



그럼 초의가 『다신전』을 편찬한 연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시자방에 있던 수홍이 다도를 알고자”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선종에는 조주풍의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잔하기)가 있었지만 모두 모르기"에 선종의 끽다거를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1830년 중춘(中春)에 『다신전』을 편찬한 연유는 이처럼 분명했다. 초의는 차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해 1837년 홍현주(1793~1865)의 요청으로 『동다행(東茶行)』을 저술했다. 이는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시기에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홍현주는 글씨와 문장에 능했던 권문세가 출신이다. 그의 형제들 또한 초의와 교유하며 차를 즐겼다. 1830년 여름 초의는 그의 스승 완호(1758~1826)의 비명(碑銘)을 받기 위해 두 번째 상경했다. 당시 초의는 추사 댁에 머물기로 약속했지만 세상일은 한 치를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다. 추사의 부친이 유배당한 것이다. 초의가 홍현주의 별서인 청량산방에 머물게 된 연유다. 당시 초의가 처한 상황은 암담했지만 결과적으론 전화위복(轉禍爲福)이었다. 홍현주의 청량산방에서 천하의 사백(詞伯) 이만용(1792~1863)과 윤정진(1792~?), 홍저원, 홍성모 등을 만났고, 초의의 시재(詩才)가 천하에 드러났으니 말이다.



변지화 편지 친필본. 『동다행』이 『동다송』으로 바뀐 내력이 적혀있다. (박동춘 소장)




최근 발굴된 진도 목사 변지화의 편지는 초의가 지은 『동다송』이 처음에는 『동다행』이었음을 밝힌 자료이다. 아울러 홍현주가 변지화를 통해 초의에게 다도를 물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동다송』으로 표제가 바뀐 것은 변지화가 다른 사람을 시켜 급히 『동다행』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이를 다시 수정 보완한 후 『동다송』이라 한 것이다.



초의는 『동다송』 이외에도 『다보서기(茶譜序紀)』라는 다서(茶書)를 저술했다. 그러나 『다보서기(茶譜序紀)』는 현존하지 않아 그 규모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외에도 초의가 사용한 다구는 동철다관(銅鐵茶罐)과 납소다관(?小茶罐), 그리고 흑색다관이며 받침이 있는 찻잔을 사용했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흑색다관이 있는데 이런 내용은 그의 유품목록인『일지암서책목록』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 후기 경화사족들이 초의의 이런 노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추사의 아우 김명희의 시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1850년경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다시(茶詩)를 일부 소개한다.



노스님 차 가리기가 마치 부처 고르듯 하니(老僧選茶如選佛)

일창 일기, 엄한 법도대로 엄선했구나(一槍一旗嚴持律)

잘 덖어낸 차, 원통을 얻었으니(尤工炒焙得圓通)

(차)향기와 맛을 따라 바라밀에 드누나(從香味入波羅密)

이 비방을 오백년 만에 들추어냈으니(此秘始抉五百年)

그 복은 옛 인천에 못지않으리(無乃福過古人天)



김명희는 초의와 교유했던 인물로, 일찍이 초의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기로 맹세한 바 있다. 그러나 병이 나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초의차를 사랑했던 그는 중국차도 즐겼다. 하지만 중국차의 질적 수준이 미흡했음을 밝힌 바 있다. ‘좋은 차는 아름다운 사람 같다‘고 했던 그는 초의가 만든 차의 품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명희는 차를 만드는 초의의 태도를 ‘노스님 차 가리기가 마치 부처 고르듯 하여/ 일창 일기, 엄한 법도대로 엄선’한다고 표현했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가는 추사의 안정을 기원하며 초의가 그린 그림. 추사와 자신의 우정을 정의한 말이 들어있다. (개인 소장)
일창일기는 가장 좋은 차잎이다. 차를 따는 시기를 잘 알았던 초의의 식견은 이랬다. 초의가 만든 차는 바라밀에 들게 하는 차였던 것이다. 바라밀은 수행의 깨달음에 이른 것, 또는 일체의 법에 집착함이 없는 경지다. 김명희는 초의차 한 잔에서 원통을 얻었고 바라밀에 들었다. 더구나 이런 차의 비방을 오백년 만에 초의가 다시 재현했으니, 초의의 이 공덕이 인천(人天)에 버금가는 일이란다. 인천은 사람과 천계를 말한다. 초의가 이룩한 차의 공덕은 인천의 은덕처럼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초의는 『동다송』에서 ‘좋은 차가 몸에 들어감에/ 귀와 눈에서 온 몸으로 퍼져 막히고 답답한 것이 사라지누나’라고 했다. 이는 차를 마신 후에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를 순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차를 마시면 가장 먼저 귀와 눈이 밝아진다고 한 것은 차가 머리를 맑게 하기 때문이다. 차의 향과 기운이 온 몸에 퍼지면 울적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지친 몸에 생기가 돈다. 바로 옛 사람이 좋은 차를 곁에 두고자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초의가 사용했던 흑색다관. (박동춘 소장)




초의가 차를 통해 이룬 궁극의 세계는 『동다송』에 그 답이 있다.





화로에 물 끓는 소리 잦아드니(竹?松濤俱簫?)

맑고 가뿐한 몸, 정신마저 또렷하여라(淸寒瑩骨心肝惺)

오직 백운과 명월, 두 객만을 허락하니(惟許白雲明月爲二客)

도인의 (찻)자리, 이것이 최상이라(道人座上此爲勝)



아, 초의의 일체(一體)는 이렇게 드러났다. 부언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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