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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우리는 미·중의 통역관인가 균형자인가

중앙일보 2015.03.28 00:01 종합 27면 지면보기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앞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점치는 데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중 관계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지 점치기는 쉽지 않다. 대립과 갈등의 원천이 될 것 같기도 하고, 평화와 통일의 지렛대가 될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과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인 사드(THAAD)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을 놓고 우리에게 어려운 결정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아직 사드의 효능에 대한 확신도 서 있지 않고, 미국이 껄끄럽게 여기는 금융 후진국 중국의 AIIB에 대한 불안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국익의 관점에서 AIIB 가입을 단행했다. 앞으로 중국이 반대하고 있는 사드 배치 문제를 어떻게 결정할지 초미의 관심사다.



 사드 배치나 AIIB 가입은 단순히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이슈가 아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문제다.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지정학적 환경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한·미·중 3각 관계를 잘 관리해 온 박근혜 정부다. 그래서 앞으로 이 3각 관계를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걱정이 적지 않을 것이다.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들이 겪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통일 이전의 독일도 비슷했다. 소련이 SS-20 중거리핵미사일(INF)을 동구에 배치한 상황. 어떻게 맞대응할 것인지를 놓고 국론이 분열됐다. 당시 총리는 중도좌파인 사민당의 슈미트. 그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의 중거리핵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동시에 소련으로부터 전략미사일 제한교섭을 이끌어 내는 전략을 결정했다. 이른바 유명한 ‘나토(NATO)의 2중 결정’ 전략 방침이었다. 후일 레이건·고르바초프에 의한 중거리핵미사일 철폐 협상의 토대가 됐다.



 이 미·소 핵교섭의 와중에 슈미트의 뒤를 이은 콜 총리가 한 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모스크바 방문을 하루 앞둔 1983년 7월 3일. 그는 “결코 미·소 수뇌의 통역관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말 심부름이나 하러 모스크바에 가는 게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도 참여정부 시절 미·중 사이에서 단순한 말 심부름꾼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국제환경을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다. 냉전시기 미국은 독일이 아무리 몽니를 부려도 소련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미국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역설적인 행운’을 누릴 수 없었다. 탈냉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몽니에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보다는 공개적으로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소 사이에서 곡예를 하다 중동의 미아로 전락한 이집트의 신세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비등했다. 결과는 한·미 동맹 강화론을 등에 업은 이명박 정부에 의한 이른바 통역관 외교의 등장이었다.



 통역관 외교는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지나친 밀착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선택지를 축소하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특히 통일이나 경제적 관점에서 중국의 비중이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코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마트’한 한·미·중 3각 관계의 관리가 정치적 과제로 떠오르게 됐다.



 박근혜 정부는 한·미·중 3각 관계의 스마트한 관리로 높은 점수를 받아 왔다. 그런데 이 스마트한 관리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사드나 AIIB가 기존 대국 미국과 신흥 대국 중국 간의 패권 경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사드 배치를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AIIB를 미국 주도의 국제금융 체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결정은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선택으로 비칠 수 있다. 이미 미·일 동맹은 우리의 중국 경사(傾斜)를 경계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발전이다. 결코 미국이냐 중국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중 사이에 새로운 냉전구도가 형성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미·중 패권 경쟁에서 균형자 역할은 우리의 능력 밖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말 심부름이나 하는 통역관에 머물 수만도 없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미·중 양국과 양호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게 우리의 전략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지적처럼 ‘모호성’의 3각 관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우리는 미·중 패권 경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어떻게 미·중이 한반도에서 충돌하지 않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우리의 지혜가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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