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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수트를 ‘남자의 갑옷’이라 하는 까닭

중앙선데이 2015.03.21 01:04 419호 29면 지면보기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를 뒤늦게 봤다. 순전히 옷 때문이다. 주변 이들마다 줄거리나 배우의 연기력보다 영화 의상을 이야기했다. ‘수트빨’이 대단하다는 거다. 인터넷엔 이미 영화 속 수트 가격과 브랜드에 대한 포스팅이 도배돼 있고, ‘킹스맨 스타일’이라는 제품도 일찌감치 나왔다. 이쯤이면 첩보 액션물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취향을 접어야 한다.

스타일#: 영화 ‘킹스맨’ 속 수트

영화는 런던의 대표 맞춤복 거리인 섀빌로우가 배경이다. ‘킹스맨’은 그 거리에 있는 양복점 이름. 비밀첩보 요원들의 아지트로 쓰인다. 여기서 베테랑 요원 해리 하트(콜린 퍼스 분·사진)와 빈민가 출신 청년 에그시(태론 에거튼 분)이 세상의 파멸을 계획하는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 분)을 처치한다는 줄거리다. 이 뻔한 스파이 영화에 강력한 눈요기가 되는 게 바로 킹스맨의 수트다.

특히 콜린 퍼스의 수트는 여자가 봐도 눈이 번쩍 떠진다. 흐트러지지 않는 원단, 패드를 넣어 단단해보이는 어깨,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이 돋보인다. 감색 핀스트라이프의 더블 브레스트 재킷(재킷의 앞여밈을 깊게 하고 단추가 두 줄인 수트)를 입고 등장할 땐 ‘콜린 퍼스의 재발견’이란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감색 벨벳 소재에 라펠 부분만 블랙으로 처리한 턱시도 재킷을 입은 모습에선 절로 입이 벌어진다. 뭣보다 수트와 함께 하는 액세서리들, 가령 브로그(앞코의 구멍 장식) 없는 검정 옥스퍼드 구두, 역동적 이미지의 사선 줄무늬 타이, 화이트 드레스 셔츠와 말끔하게 접어넣은 포켓 스퀘어(가슴 주머니에 꽃는 장식)를 보자면 ‘화룡점정’이란 이런 거구나 싶다.

하지만 냉정해지자. 왜 이렇게 수트 몇 벌에 호들갑을 떠는 걸까, 더구나 54세 중년 배우를 새삼 호명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거다. 그리고 분명한 한 가지는 우리가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신사복’을 감상하게 됐다는 거다.

요즘 남자 옷, 그야말로 중성적이다. ‘앤드로지너스룩(Androgynous Look, 성 개념을 초월한 옷차림)’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지 반세기가 넘으니 꽃무늬나 시스루는 그렇다 치자. 최근엔 아예 무릎길이 치마를 입고 나오는 컬렉션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또 마르기는 얼마나 말라야 입을 수 있는지. 라펠(수트의 깃), 바지단, 타이의 폭도 덩달아 슬림해진다. 그걸 소화해 내는 톱스타 남자 배우들의 모습은 누가누가 날씬한가를 보여주는 배틀로 비쳐진다.

멋쟁이 남자들의 교본이라는 피티워모(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일년에 두 번 열리는 남성복 박람회) 패션 역시 젠틀맨의 옷차림과는 거리가 있다. 색깔 있는 재킷과 셔츠(주로 블루다)에 중성색 면바지를 받쳐 입는 스타일링이 기본 중 기본. 그나마 요즘은 스포티즘의 영향으로 캐주얼이 대세다. 꾸밈 역시 과하다 싶을 만큼 튀는 양말이나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는 게 일반적이니, 감각과 별개로 정석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하여 ‘유니섹스’와 ‘믹스앤매치’의 대세 속에서 정통·클래식·수트의 3박자를 갖춘 남자의 옷은 희소가치가 충분하다. 남성성을 내세울 이유도 필요도 사라져가는 요즘이기에 더 그렇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수트는 신사의 갑옷”이라는데, 이젠 갑옷을 영광보다 부담으로 느끼는 남자들이 더 많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글 이도은 기자dangdol@joongang.co.kr, 사진 20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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