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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남은 건 12권의 수첩 뿐, 그 속에 새 길이 있었다

중앙선데이 2015.03.22 00:03 419호 6면 지면보기
[사진 최정동]
자유인이 된 첫날 탔던 지하철 풍경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느긋함을 즐기자는 심사에서 출근시간을 피해 탔는데, 아뿔싸! 지하철에는 수많은 중년들로 넘쳐났다. 평일 등산길, 공공도서관, 커피숍, 당구장, 가는 곳마다 비슷했다.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였다. 내 눈에 비쳐진 것은 자유인의 여유가 아니라 가족의 무거운 책임감을 어쩌지 못해 서성거리는 가장들의 불안한 모습이었다. “돈이란 주화로 입혀진 자유(Money is coined liberty)”라는 말처럼 경제적 자립이 없는 상태에서 자유라는 이름은 너무도 잔인한 사치였다.

수퍼시니어로 사는 법

어찌 나뿐이랴. 1차 베이비부머 세대(1955~63년생)를 필두로 퇴직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경기 침체에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정년 60세 연장을 앞두고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겹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평균수명도 높아져 ‘100세 시대’가 현실화하면서 중년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퇴직 후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는 ‘행운아’들도 더러 있지만, 인생 이모작을 속수무책으로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함 좀 줘봐”라는 말만 들어도 잔뜩 주눅이 드는 예비 시니어들의 어깨는 점점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잘난 척하는 동창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뒤처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모임에 나가지 않으려는 외톨이형 중년들도 주변에 적지 않다.

최근 어느 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즘 뭐하냐”는 질문에 한 참석자가 “장로가 됐다. 내친김에 목사가 되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장로는 장기간 노는 사람의 준말이고 목사는 목표 없이 사는 사람이란다. 풀이 죽어있을 법도 한 그는 여전히 당당했으며 불운의 시간조차 즐길 줄 알았다. 좌중을 편하게 해주는 유머 감각의 소유자, 정말이지 멋진 ‘장로’, 멋진 ‘목사’였다. 덕분에 자칫 껄끄럽게 흐를 것 같았던 모임의 분위기는 밝고 즐거운 시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가 어느 중견기업의 핵심 중역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나도 최근 길고 어두운 실직이라는 터널에서 마침내 빠져나왔다. 출구를 몰라 폐쇄공포증에 걸릴 것 같았지만 그 혹독한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 만남 덕분이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 활력 바이러스가 위기 면역력이란 항체로 심어져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그는 ‘수퍼시니어’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인 ‘수퍼주니어’처럼 젊은 시절에만 ‘수퍼’라는 찬사가 붙는 게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수퍼 중년’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돌아보니 주변에 수퍼시니어들이 적지 않았다. 경제력뿐이 아니다. 삶에 대한 건강한 태도와 문화적으로도 남과 다르게 사는 신개념 중년들이다. 그들은 성공보다 보람 있게, 영원한 현역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다. 확실히 앞 세대와는 차별화된 삶의 방식이다. 건강하고 경쟁력 있으며 매력적인 중년들, 그들이 바로 이 시대의 주역인 수퍼시니어다.

손관승 세한대 교수가 간직해 온 12권의 업무수첩. iMBC 대표를 지내면서 느낀 경험과 실수, 아이디어 등을 담고 있다.
퇴직 후 어느 날 서가에 나란히 꽂혀 있는 업무수첩이 눈에 띄었다. 모두 12권. 경영을 하면서 느낀 경험과 실수, 회의 도중 스쳤던 아이디어, 책 읽다 메모해 두었던 인상 깊은 구절들이 그 안에 적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순신 장군이 출전을 명령받고 외쳤다던 12척의 배와 숫자가 같았다.

“아직도 배가 열두 척 남았고 미천한 신하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尙有十二隻 微臣不死).”

그렇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퇴임과 함께 모든 것이 일거에 내 손을 떠났지만 열두 권의 수첩만은 용케 남아서 수호신처럼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사무실 열쇠, 비서, 전용차, 기사, 법인 신용카드, 심지어 명함조차 없다. 아무도 제2의 인생 로드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기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정작 뭘 어떻게 해보라는 구체적 제안은 드물었다. 막막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12권의 수첩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차를 마시며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우선 ‘번 아웃(Burn Out)’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휴대전화기의 배터리가 방전돼 꺼지기 직전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진된 증상을 말한다. 미국의 리더십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다. 지치고 피곤하면 짜증을 내고 집중력을 잃어 그릇된 판단을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그만둔 직후 나는 얼마 동안 끙끙 앓았다. 아무것도 못하고 잠만 잤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온 탓이었다.

이럴 때는 잠시 쉬어가야 한다. 피곤에는 장사 없다. 유대인의 오랜 지혜인 사바스(Sabbath), 즉 안식일 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잠시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서 제2의 인생 출발 전 갭 이어(Gap Year)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세상엔 많은 중독이 있다. 도박과 마약중독이 유명하지만 세상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성취중독이다. 한국 중년의 상당수는 일중독, 성취중독, 사회중독이 심각하다. 적당하면 발전의 동기유발에 좋지만 과하면 영혼을 잠식시키는 무서운 독소가 된다. 한때는 매력 넘치고 멋있던 사람들이 무서운 얼굴로 변해가는 것은 이 중독 때문이다. 어쩌면 나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괴테의 책 한 권 들고 길을 떠났다. 괴테는 위대한 문호이자 바이마르 공국의 행정책임자, 즉 군주를 대신한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하고 있었다. 10년 넘게 봉직하다 고갈돼 가는 창의력을 자각하고 기득권을 던지고 과감히 이탈리아 여행길을 떠났다. ‘중년 위기’(Middle Age Crisis)를 겪고 있던 그는 로마에서 다시 태어나길 갈망했다. 괴테는 내가 묻고 싶었던 것을 먼저 묻고 있었다. “너는 옛날에 미쳤거나 아니면 지금 미쳐 있다!”

정말이지 나는 미쳐 있었다. 나뿐이 아니라 한국의 중년 상당수가 미쳐 있었다. 성과라는 이름 앞에 ‘나’라는 인생의 주어는 언제나 빠져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낯선 나폴리 고속도로에서 렌터카 타이어가 터지는 사고를 당해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사고는 동시에 인생에 대한 관점을 바꿔주었다. 하나의 직업을 마치고 은퇴하는 것을 가리켜 영어로 리타이어(retire)라 말하는데 타이어를 교체하는 것 역시 리타이어(re-tire)였다. 마치 타이어를 교체하듯 직업이나 직장만 바꾸면 되니까 너무 당황할 필요가 없었다. 옛것을 버려야 새것을 얻는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파괴였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다 끝났다고 절망한 순간 기적도 찾아오는 법이다. 답답한 심정에 나의 솔직한 상황을 책으로 펴냈는데 그것이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강연 요청과 원고 청탁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엔터테인먼트와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강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새로운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왔던 길 위에 있었다. 1년 반의 방황 시간은 진정 내 인생의 축복이었다. 인생이란 올라갈 때 강건해지고 내려올 때는 현명해지기 마련이니까. 이순신 장군에게 『난중일기』가 있다면 나에게는 자유인 일기가 있다. 수첩 12권의 메모와 실직 일기를 바탕으로 ‘수퍼시니어로 가기 위한 10가지 체크리스트’를 요약해 봤다.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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