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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빌 비올라와 원효, 살고 죽는게 고통

중앙일보 2015.03.21 14:52
빌 비올라의 받아들임(Acceptance)




“삶은고통입니다.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죠.”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는 부처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기자간담회에서였다. 전시작 중 ‘물의순교자’와 ‘도치된 탄생’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5년 전 영국왕립미술원에서 본 한 작품이 떠올랐다. 내가 처음 본 비올라의 작품이었다. 세로로 길쭉한 모니터의 ?검은 화면 속에서 희끄무레한 형태가 변하고 커지는 이 비디오 작품은 마치 움직이는 모노크롬 추상화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화면을 향해 슬로모션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나체의 여자 같았지만 아웃 오브 포커스라 확실하지 않았다.



화면 가까이 온 그 사람은 쏟아져 내리는 물의 벽 속에 얼마간 서 있었다. 암흑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물줄기가 그녀의 정수리에서부터 끝없이 빛의 그물을 덮듯 떨어졌다. 물줄기에 의해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고 특히 그녀가 입을 벌릴 때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을 닮아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팔로 흘러내린 물줄기가 손에서 빛의 알갱이처럼 흩뿌려질 때는 신성한 신비로움이 있었다. 그 사람은 시시각각 고통스러운 듯, 황홀경에 이른 듯, 다시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얼마 뒤 그 사람은 마침내 물의 벽을 지나 나왔다. 나이가 많고 머리를 짧게 깎은 여자였다. 완전히 나체였지만 에로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이든 여체가 초라한 것도 아니었다. 서구 회화에서 끈질기게 반복해온 관음의 대상으로서의 ‘미녀’로 나온 것도, 그렇다고 동정의 대상으로서의 ‘노파’로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인간’의 대표로 나온 것 같았다.



그녀는 화면을 향해 우는 듯 웃는 듯 찡그리는 듯 호소하는 듯 달관하는 듯 그렇게 미묘하게 변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동리의 『등신불』이 주는 것 같은 충격을 그 표정에서 받았다. 그녀는 마침내 몸을 돌리고 다시 물의 벽을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아웃 오브 포커스되어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작품은 빌 비올라의 2008년 작 ‘받아들임(Acceptance)’이었다. 어울리는 제목이다. 쏟아지는 물줄기 벽을 통과할 때 무(無)에서 유(有)로 나오는 탄생의 고통과 환희를 겪는 것 같았다. 물줄기를 통과해 나왔을 때 그녀의 표정은 존재함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겪는 쾌락과 고통을, 삶으로 인한 희로애락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등을 돌려 다시 물의 벽을 통과해 원초의 어둠과 무(無)로 돌아갔다.



원효대사가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 ” 그러나 해탈에 이르지 않은 인간은 삶과 죽음의 고통을 감각의 환희 못지않게 받아들일(accept) 수밖에. 그래서 ‘받아들임(acceptance)’이 작품의 제목이 된 것이라고 느꼈다.



많이 지쳐있던 나는 그 작품에서 위로를 받았다. 아마 비올라의 이번 서울 개인전도 관람객에게 치유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 마침 내일 시작하는 예술의전당 ‘마크 로스코’전도 힐링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위로가 필요한 세상에 어울리는 전시들이다.



문소영 코리아 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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