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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삶 느린 생각] 선물과 뇌물·물질시대의 사회의식

중앙일보 2015.03.21 14:17
1 1976년 미국 독립 선언 200주년 기념에 맞추어 열린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여러 발표가 있었지만, 인상적인 일 하나는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학자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대화나 발표가 반드시 이데올로기에 구애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때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의 통치하에 있었다. 공산국가에서 발행된 잡지를 가지고 귀국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두려운 일이기는 하였지만, 가지고 온 잡지는 귀국 후에야 읽어볼 수 있었다. 서구어 논문들이 실린 이 문예학술지도 비슷하게 자유로운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조직위원회에 참여한 미국인 친구 덕택에 나는 미 국무부의 간부직원과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잠깐 근무하였던 미국의 대학에서 알게 된 이 미국사 교수와 국무부 직원과는 동창생이어서, 점심은 단순히 옛 우정을 다지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멀리서 온 나를 끼워 준 것이었다. 점심이 끝난 다음에 국무부 직원은 친구 교수가 내려는 점심값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공짜 점심을 먹는 것도 점심을 사는 것도 공무원의 복무 규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 간의 점심도 받아먹어서는 아니 되는 미국 정부의 엄격한 규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공공질서가 부패에 잠식되어 있다는 인상은 주지 아니한다. 물론 근년에 와서 정당 그리고 선거 자금에 기부를 제한하는 규정이 완화되어 미국의 공공질서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로는 청렴도와 투명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상당 정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 공적 규율의 엄격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는 역으로 이러한 규율은 사회의 도덕적 엄격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위에 말한 점심이 있었던 한 참 후, 한 국제회의에서 구 유고슬라비아의 한 지역-슬로베니아 아니면 세르비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에서 온 교수를 만난 일이 있다. 2000년대에 와서 놀라운 일은, 한국인의 발걸음이 얼마나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만, 90년대 초반에 벌써 이 구 유고슬라비아 대학의 교수 지도하에 박사학위 과정의 한국학생이 있었다. 이 교수는 그 학생이 한국에 다녀온다든지 할 때, 선물을 가져다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는 말을 하였다. 그 학생의 선물은 스승의 은혜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일 뿐 어떤 숨은 의도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는 설명을 완전히 납득하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 유럽인에게 공적 관계에 있어서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사회 관습이 아니었다.



‘김영란법’과 관련해 여러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필요한 것은 더 엄격한 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용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부정 청탁이나 금품 수수의 숨은 관행의 철저한 척결 없이, 우리 사회가 보다 좋은 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과속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말 소위 ‘도금시대 (The Gilded Age)’는 부패가 만연하였던 시대이다. 그러한 부패가 극복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2 금품 수수란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선물의 교환 자체는, 그것이 선의에 기초한 것인 한, 미풍양속에 속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것을 바르게 이어나갈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씨앗이 될 수도 있는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의 엄격한 규제가 절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선물과 관계하여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다른 가능성을 잠깐 생각해보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르셀 모스의 『선물론 (Essai sur le don)』은 인류학 사회학에서 고전적인 저서이다. (『증여론』이라는 제목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것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이면서 현대 서구사회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다. 선물을 교환하는 것은 원시사회에서 상호 유대를 확보하는 사회 행위의 일부이다. 교환행위는 경제적인 그리고 인간적, 정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물의 교환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주는 것과 갚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호혜적 균형은 단순히 정(情)과 선의로 하여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은 되돌림의 의무를 수반한다. 선물 교환의 의식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잔치, 특별한 기회와 명절-출생·결혼·죽음과 같은 기회에 베푸는 잔치이다. 이 경우에도 받았던 것은 기회를 잡아 다시 되돌려야 한다. 선물의 관습은, 모스가 예시하는 바로는, 옛 게르만족에도 있었던 것인데, 의무로서의 되돌림의 무거움은, ‘선물(Gift)’이라는 독일어 단어의 모순된 의미에서도 볼 수 있다. 영어에서 gift는 선물을 말한다. 독일어에서 Gift는 일차적으로는 ‘독(毒)’을 뜻하지만, ‘선물’이란 뜻도 가진다. 선물은 그것이 부과하는 보은 (報恩) 또는 반제(返濟)의 부담으로 하여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기이한 두 가지 뜻이 유래한다.



그런데 교환의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게 되는 일도 일어난다. 선물은 집안의 지체, 또는 위세(威勢)의 경쟁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받는 것보다 갚는 것이 커야 체면을 살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물 교환은 선의와 우호의 행위보다 위세와 위신과 세력 과시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심한 경우, 잔치를 통한 잔치의 경쟁은 값비싼 물건들을 다투어 파괴하는 행사를 수반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선물행위에 부정적 측면에 주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면서도, 모스는 선물 교환 의례를 긍정적인 사회 행위의 모델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것이 사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오래전부터 지속해온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취한다. 이 전통적 그리고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공동체의 일체성이다. 선물의 교환 관계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러한 일체성을 다지는 일이다. 이 교환 관계에서 주고받는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교환은 사람들의 영혼의 유대를 상징한다. 물건도 그 나름으로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영혼을 나누어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받은 선물을 가볍게 처분하지 못하는 심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선물의 존재 방식은, 근대 공리주의 사회의 ‘냉정한 계산’에 기초한 상품의 존재 방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서 선물 교환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총체적인 증여’-모든 것을 내어주는 관계이다.



3 모스의 선물론은 원시 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면서도 그의 정치 노선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장 죠레스의 중도 사회주의에 동조했다. 전체적으로 원시사회에서의 교환 관계는 삶 전체를 포괄하는 관계이다. 선물의 교환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면서 집단 전체의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물교환만을 말하지 아니한다. 흔히 음악과 무용, 즐거운 놀이, 종교 행사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모스는 원시 사회 그리고 전통사회에서의 예술 지원, 너그러운 접객 행위, 공사(公私)를 막론한 축제 지원 등 기쁨을 위한 출자를 언급한다. 이러한 것들은 근대의 ‘사회 규범의 경직성, 추상성, 비인간성’에 대비된다. 그러나 그의 시대의 관점에서 모스가 강조하는 것은 선물 교환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지원과 협동의 요소이다. 오늘의 사회의식에는 ‘자비심·사회봉사·유대감’ 등의 순수한 정서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원시사회의 선물 의례에 들어 있는 ‘자유와 의무, 관대함과 자기이익의 수호’와 같은 요소들이다. 여기의 ‘자기 이익’이라는 말은, 얼핏 보기에, 이기적인 모티프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증여와 반제의 의무의 균형을 상기시킨다. 사회 성원이 노동과 삶을 사회 공동체에 바쳤다면, 사회는 그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그의 이익이 빠질 수는 없다. 그 연속 상에서 사회 보장은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것은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개인은 오늘의 사회 보장 제도 하에서도 자신의 삶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삶과, (노동쟁의 중의) 미불임금과 질병과 노년과 죽음’을 국가가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유풍은 오늘의 사회에도 잔존한다고 모스는 말한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탄생·결혼·장례 등의 경조사에 촌민 전부가 참석하는 데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이의 출생을 기념하는 잔치에는 동네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계란 하나씩을 가지고 간다. 일반적으로 잔치에 초대할 때, 그것이 예의 바른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예로부터의 유풍이다. 모스가 언급하는 옛 관습 또는 거기에서 나온 관습에는 ‘전문직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명예의식, 무사공평 원칙, 직업적 유대감’ 등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공동체적 협동 의식이 현대화된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4 이러한 유풍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가 대체적으로는 인간적인 공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스는 옛 선물의 인간적 협약을 상기하게 하려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또는 그 바탕으로 필요한 것은 모든 사회 활동에서 지켜야 하는 공적 기율이다. 어떤 인류학자는 소규모의 인간집단-마을이나 종족이나 부족국가 등의 규모를 넘어가면 모든 정치 체제는 결국 도둑정치체제 (kleptocracy)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의 도둑정치는 세금을 부과하는 체제까지를 포함한 것인데, 잠재적으로 정치가 이러한 체제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공적 기율이 없이는 모든 공적 기능 또는 인간관계는 사익의 거래 관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선물은 뇌물이 되어버린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선물 교환의 관계는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규율을 넘어 호혜적 교환이 보다 인간적이 사회 이상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간관계라고 해서 기율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 호의적인 집회-결혼식이나 장례식 또는 권력자의 출판 기념회를 보아도 순수한 인간적 감정이 얼마나 거짓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사에는 규범이 필요하다. 위에서 모스에서 인용한 무사공평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desinteressement(무이익성)’의 번역이다. 이것은 그 앞에서 ‘자기이익’이라고 번역한 ‘interet’ 를 벗어나는 태도를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기 이익의 수호도 자기 이익을 넘어가는 무사공평한 사회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규범의 경직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성 회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 영역의 규범이 확립된 다음의 과제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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