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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에너지드링크 등장 왜…"숙면·릴렉스에 좋다" 음료戰

중앙일보 2015.03.21 13:29
레드불·핫식스·몬스터·볼트…. 마시면 힘이 불끈 솟고 정신이 번쩍 든다는 에너지드링크의 편의점 진열대에 최근 새로운 음료가 등장했다. 카페인·에너지 같은 단어를 내세운 에너지드링크 사이에 놓여 있는 은색 캔에는 ‘마음을 식혀주는 음료(Mind Cooler)’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릴렉세이션(Relaxation)·안티-에너지(anti-energy) 드링크라는 ‘슬로우 카우’다.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탄산음료인데도 피로에 지친 몸을 이완시키고 잠을 푹 재워준다는 시음 후기가 이어지면서 ‘숙면 음료’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잠 쫓고 원기회복 개념과 반대
레드불 급발진, 슬로우카우 급제동
“휴식마저 음료로 해결 욕망일 수도”

CJ제일제당도 올 초 ‘꿀잠’을 자게 해 준다는 숙면보조식품 ‘슬리피즈’를 출시했다. 뉴질랜드에서 밤에 짠 우유로 만든 분말을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도록 한 제품이다. 같은 젖소라도 낮에 짠 우유보다 밤에 짠 우유에 멜라토닌이 열 배 더 함유돼 있어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회사 측 주장이다. CJ제일제당 관계자는 “미국과 일본에서 큰 시장이 형성돼 있고 수면의 질을 중시하는 국내에서도 숙면 식품 시장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2011년 레드불이 공식 수입된 이래 국내 에너지드링크 시장은 급성장했다. 야근하는 직장인, 시험을 앞둔 수험생, '불금'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에너지드링크를 마셨다. 잠을 쫓아가며 일하고, 공부하고, 놀던 이들이 이제는 잠을 자기 위해 또 다른 음료를 마시는 시대가 온 걸까.



각성 대신 이완, 피로회복 초점



릴렉세이션·안티-에너지 드링크는 미국 등에서는 2~3년 전부터 시장에 나와 인기를 끌었다. 출발은 “에너지드링크는 이렇게 많은데, 왜 진정시키는 음료는 없는가”하는 의문이었다. 에너지드링크의 카페인 부작용 논란이 거듭된 것도 이유가 됐다. 에너지드링크 열풍의 반작용으로 신개념 음료가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허브 추출물 등으로 마음을 안정시켜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각성·흥분시켜 피로를 잊게 만드는 에너지드링크와 반대 방식으로 피로를 해소한다는 논리다.



그 중에서도 ‘슬로우카우’는 ‘에너지 드링크계의 코카콜라’라는 레드불을 겨냥해 2008년 만들어졌다. 이름부터 레드불의 패러디다. 거칠고 강한 ‘황소(bull)’의 이미지와 정반대인 순하고 느릿느릿한 ‘암소(cow)’를 사용했다. 캔에도 들이받을 듯 힘찬 황소 대신 뻗어버린 암소를 그려 넣었다. 국내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수입돼 일부 편의점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마셔 본 이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밤에 두세 번씩 깨는데 알람이 울릴 때까지 푹 잤다" "노곤해지면서 바로 쓰러졌다”는 등 효과를 봤다는 이들이 있다. 반면 “몽롱해질 뿐 잠은 오지 않는다” “오히려 말똥말똥해진다”는 정반대의 반응도 있다. 반응이 분분하지만 공통점은 '잠'이다. 정작 제조사는 “졸음을 유발하거나 수면을 유도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지친 몸과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극도의 피로로 인한 일시적 불면 증상을 완화해 주는 음료”라는 것이다.



이런 음료의 주 성분에는 진정 효능이 들어 있다. ‘슬로우카우’에서 눈에 띄는 것은 'L-테아닌'과 '발레리안뿌리' 추출물이다. 녹차에 함유된 아미노산의 일종인 L-테아닌은 긴장과 불안을 완화하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국내에서도 건강기능식품 원료로 인증받아 여러 관련 제품이 나와 있다. 우리말로 서양쥐오줌풀인 발레리안은 천연 진정제로 사용되어 온 약초다. 억제성 신경전달물질로 흥분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하는 GABA 수용체와 친화성이 있다. GABA가 활성화되면 수면에 도움이 된다. 카모마일·라임블로섬 등 차로 마시는 식물성 추출물도 포함돼 있다. 국내에 출시되지 않은 ‘저스트 칠(Just chill)’ ‘굿 나이트(Good night)’ 등 다른 제품에도 사용되는 성분들이다.



따뜻한 우유 한 잔이 수면에 도움된다는 건강 상식으로 통한다. 이 때문에 밤에 짠 우유라는 ‘슬리피즈’는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서울대 분당병원 수면클리닉 윤인영 교수의 임상시험 결과에서는 “괜찮은 효과”가 나타났다. 윤 교수는 대조군과 실험군에 일반 전지분유와 ‘슬리피즈’를 2주간 각각 마시도록 했다. 그 결과 밤에 짠 우유를 마신 이들이 “빨리 잠들고, 오래 자고, 잘 잤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답했다. 제품을 개발한 홍은영 CJ제일제당 수석연구원은 “사람의 경우에도 밤에 모유를 먹였을 때 아기가 잘 잔다는 논문이 있다”며 “제품에 함유된 멜라토닌은 소량이지만 숙면에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불면증까지는 아니지만 수면에 어려움을 겪거나 중요한 일을 앞둬 잘 자야하다면 제품을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7시간도 안 되는 평균 수면시간



이처럼 잠을 재워준다는 음료는 2012년에도 등장했다. 롯데헬스원이 백병원과 공동연구해 출시한 ‘꿈속으로 양백마리’다. ‘슬로우카우’처럼 L-테아닌을 주요 성분으로 한 병 음료다. 임상시험 결과 효능이 나타났고 “양 100마리를 세기도 전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는 후기가 이어졌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3년 전 사실상 시장 진입에 실패한 제품의 재등장에 대해선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가 해를 거듭할수록 훨씬 피로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의 '2012년 회원국 평균 수면시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은 하루 평균 7시간 49분을 잤다. 조사대상 18개국 중 최하위이고, 전체 평균보다 33분 적었다. 한국갤럽의 2013년 조사에선 6시간 53분으로 더 줄어들었다. 부족한 잠을 줄여가며 경쟁해야 하는 사회에서 릴렉세이션 드링크, 숙면 음료 틈새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얘기다. 윤 교수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환경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데다 시스템을 바꾸려면 시간이 걸려 제품 등 여러 방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에너지드링크가 성공했기 때문에 그에 반(反)하는 음료도 주목받게 됐다는 견해도 있다. 건국대 하지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밤에는 술을 마시고 낮에는 커피를 마시듯 강화와 이완을 번갈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레드불에 의존해 정신을 급발진시키듯 슬로우카우를 통해 급제동을 하려는 것 같다”며 “휴식마저 도구를 이용해 빨리 해결하려는 욕망이 읽힌다”고 덧붙였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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