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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는 미래의 인간"…그가 벌인 진짜 혁명은 문맹퇴치와 의료복지

중앙일보 2015.03.21 13:10
17일(현지시간) 뉴욕과 아바나를 잇는 비행기 직항편이 운항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미국과 쿠바가 53년 만에 국교정상화를 선언한 뒤 양국 교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만든 혁명의 나라, 음악과 춤과 시가와 야구의 나라…. 우리가 알고 있는 쿠바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2014년 9월 한달 동안 쿠바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돌아온 영화감독 정승구가 '혁명의 민낯'을 전한다. [편집자]


정승구의 '쿠바에서 보낸 한 철' <1> 살아있는 신화를 찾아 (上)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염원했던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의 아이콘
상업화된 '국가 마케팅'에 변질 …'이분법' '단순화'의 그림자
"조국 아니면 죽음? 이민갈 자유도" …'신격화' 덕분에 계속되는 존재감

◆승리를 향하여 영원히!◆



체 게바라(Che Guevara)가 이끄는 게릴라들의 집중포화로 벌집이 된 정부군의 기차는 탈선하고 말았다. 인근 농과대학의 불도저를 동원해 철로 일부를 떼어낸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바로 전날 체는 불과 300여 명의 혁명군을 이끌고 산타클라라로 들어왔다. 체의 부대는 긴 여정과 잦은 전투로 지쳐 있었고 무기와 식량도 넉넉지 않았지만, 승리를 확신했다. 산타클라라의 민심은 이미 혁명군 편이었다.

1958년 12월 31일 체는 자신이 직접 개설한 단파방송 ‘반군 라디오’를 통해 승전보를 전했다. “승리를 향하여 영원히(Hasta la Victoria Sieempre)!” 체가 기차에서 탈취한 대량의 무기는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조직 M-26-7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갖게 해줬다. 그리고 그날 밤, 연말 파티를 즐기던 바티스타와 그 패거리들은 3억 달러어치의 유동자산을 챙겨 비행기로 쿠바를 빠져나갔다. 혁명군의 승리였다.



◆"정치적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 것"◆



구수한 시가연기와 끈적한 설탕냄새. 쿠바에 도착한 날 받은 나의 첫 인상이었다.



토론토에서 내려왔기에 시차를 맞출 필요는 없었다. 60년대 유럽영화에나 나올법한 인테리어의 호세 마르티 공항은 시골역사보다 한산했다. 안내방송은 고사하고 음악조차 틀어 놓지 않아 엄숙함마저 느껴졌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하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던 세관직원들이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있는 나를 귀찮다는 표정으로 통과시켰다.

“비엔 베니도 엔 쿠바!”



나를 기다리던 하비에가 다가와 반갑게 악수했다. 키는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그는 총알 같은 말투로 자신을 소개하며 쿠바에 온 것을 환영했다. 단박에 봐도 머리회전이 빠른 재주꾼이라 신뢰가 갔다.



나를 아바나 시내로 데리고 가던 이 전직 기자는 매뉴얼을 숙지시키듯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쿠바에 있는 동안 정치적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 것. 공공장소에서는 물론 호텔에서도. 취재비자 없이 들어왔으니, 혹시 누가 묻더라도 직업을 말하지 말고 관광객이라고 할 것. 쿠바에서는 언론인·영화감독·작가·저술가 등의 직업을 가진 이들은 취재비자 없이는 어떠한 형태의 취재활동도 불법이었다.



취재비자를 발급 받으면 쿠바 공보관의 도움 또는 관리하에 여행과 취재를 해야 됐다. 수많은 매체에서 쿠바가 ‘인민의 낙원’ 또는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로 판박이 보도되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취재비자를 받지 않고 ‘아는 인맥’을 통해 쿠바를 여행할 계획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에볼라 사태를 막기 위해 추가로 쿠바 의료진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왔다. 2014년 가을, UN안보리는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에볼라에 대응하기 위해 나섰다. 국제사회가 그저 탁상공론에 머물고 있을 때, 이미 서아프리카에 도착해 캠프를 차린 165명의 의료진이 있었다. 누구보다 먼저 나서 전 세계를 감동시킨 그들은 체 게바라의 후예들이었다.

도착 다음 날, 아바나 구시가지의 헌책방에서 나는 보물을 찾았다. 체 게바라 사망직후 출간된 볼리비아 게릴라일지 초판이었다.

“남는 게 없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온 사람한테 털렸다.” 책장수의 엄살과 익살이 예술이었지만, 치열한 흥정 끝에 적절한 가격에 샀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체 게바라로 도배된 나라에 사는 이들은 의외로 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마치 예수를 모르는 교인들처럼, 상품을 모르는 상인들처럼, 쿠바인들은 믿고 파는데만 열중하는 것 같았다.



◆산타클라라 광장의 기묘한 정적◆



체 게바라의 묘와 기념비가 있는 산타클라라는 쿠바에 도착한 첫날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사람은 거의 없고 비현실적으로 고요했다. 그 거대한 광장에 나 홀로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받고 서 있는 체 역시 외로워 보였다.

“혁명은 라틴아메리카 전체로 퍼져야 한다”는 체의 신념을 반영하기 위해 7m 가까운 동상은 서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에 든 소총은 역동적이었던 체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 모든 조각과 작은 타일 하나까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정교하고 기하학적인 기념비는 강직한 체의 성격과 투지를 보여주기 위해 설계됐다고 했다.





‘체 게바라’를 구글검색하면 28년 6월 14일 출생했다고 나온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는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28년 5월 14일에 태어났다.



체의 부모가 결혼할 당시 신부는 임신 3개월째였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 상류층, 특히 보수적 가톨릭 문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속도 위반 부부는 남편의 사업을 핑계 삼아 로사리오로 떠났고 6개월 뒤 아들을 출산했다. 의사 친구의 도움으로 출생증명서를 6월 14일로 위조해 약 두 달 조산한 것으로 꾸며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친지들에게 알렸다. 체 게바라는 출생부터, 아니 잉태부터 기득권을 불편하게 만든 존재였다.





어린 에르네스토는 다른 상류층 아이들과 달리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다양한 계급의 아이들과 터울 없이 사귀었다. 목욕을 잘 안 하고 셔츠를 일주일씩 입어서 ‘찬초’(Chancho: 더러운 돼지)라 불렸지만, 정이 많고 똑똑한 그를 모두들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은 그는 삶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에르네스토는 삶의 의미를 고통을 겪는 타인을 돕는 의술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는 항상 더 큰 세상을 보고 싶어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 불리며 이제는 전설이 된 여행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미국의 기업들과 대지주들로부터 착취당하는 남미의 노동자들을 보며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에르네스토는 세상의 ‘운이 없는’ 자들을 위해, 또 그런 자들을 줄이기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다짐하며 라틴아메리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상상을 시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학위를 마치고 의사가 되지만, 결국 다시 떠나게 된다. 그 이후로는 고향 아르헨티나의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멕시코에서 카스트로와의 운명적 만남◆



미국을 빼고 쿠바를 이해할 수 없듯,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 역시 시대와 미국이 만들어낸 인물이다.



체는 대륙을 돌며 라틴아메리카의 적은 미국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자본주의 문어’ 유나이티드 푸루트 컴퍼니(UFCO·The United Fruit Company)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19세기부터 미국이 기회가 될 때마다 중남미에 사사건건 개입한 이유는 자원과 저임금 때문이었다. 식품유통 대기업UFCO가 장악한 나라를 소설가 오 헨리는 ‘바나나공화국’이라고 표현했다.



과테말라는 대표적인 바나나공화국이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르벤츠 대통령은 53년부터 토지개혁을 추진했고, 이를 라틴아메리카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모델로 여긴 에르네스토는 과테말라에 정착했다. 이 시절에 그는 아르헨티나 방언으로 ‘친구’라는 뜻의 ‘체’(Che)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토지개혁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UFCO는 다방면으로 과테말라 정부를 압박하고 회유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은 아르벤츠는 멈추지 않았다. 워싱턴도 좌시하지 않았다. 54년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다. 막대한 이권으로 뭉친 미국의 정경유착에는 윤리도 수치도 없었다. 미국이 진두지휘한 군사 반란을 체험한 체는 민중을 위한 개혁은 오직 무력투쟁뿐임을 확신하며 멕시코로 갔다.





그 시절 멕시코시티는 중남미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활발히 교류하던 곳이었다. 체의 친구인 마르크스주의자 라울 카스트로는 형 피델을 그에게 소개했다. 둘은 처음부터 죽이 맞았다. 그들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과 혁명은 쿠바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했다. 그 당시에는 둘 다 몰랐을 것이다. 그 만남이 그들의 인생은 물론, 20세기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국은 20세기 초부터 쿠바를 자국의 식민지로 길들여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 바티스타 정부는 워싱턴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을 넘어, 미국 마피아 돈에 놀아나는 총체적으로 부패한 집단이었다. 특권층 아닌 대다수 쿠바인의 삶은 처참했고, 잔인한 철권통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56년 11월 25일 새벽, 체는 81명의 동지들과 함께 쿠바로 떠난다. 그런데 상륙하자마자 매복 중이던 쿠바 정부군으로부터 대대적인 습격을 당해 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체도 목에 부상을 당했다. 목을 손으로 지혈하는 체 옆엔 탄약과 응급처치가방이 있었다. 당장 도망쳐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체는 주저 없이 의약품이 아닌 탄약을 챙겼다.





◆실수 용납않는 엄격함…소년들에겐 따뜻◆



나는 궁금해졌다. 쿠바 국토를 횡단하며 지나는 도시, 마을마다 체 게바라의 그림과 동상을 접할 수 있었지만, 산타클라라 외에 체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는 곳이 또 어디 있는지.

“시에라 마에스트라.”

“거긴 산속 정글이잖아.”

“체는 정글에서 싸우고, 산타클라라에서 싸웠어. 아바나에 잠시 있다가,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싸웠고, 그리고 남미에서 싸우다가 죽었지. 체 게바라는 진정한 게릴라이고 혁명가야.”



하비에의 말을 듣는 순간, 어쩌면 쿠바에는 체 게바라가 없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체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혁명군 대부분은 그를 경외했다. 체는 늘 절제력을 강조했고, 작전에 있어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열대밀림 산악지역에서의 게릴라들에게는 많은 건강상 문제들이 발생했다. 체는 모두의 군의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심한 의사선생님이 결코 아니었다. 체는 목숨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치료를 했다. 대원들은 환자의 고통에 무감한 메디꼬(의사) 게바라 역시 무서워했다.



그러나 모든 대원들이 체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체는 바티스타 정권에게 부모를 잃고 자원한 어린 대원들에게는 한 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스승이었다. 보건이나 교육시설이 전혀 없는 절대 빈곤에서 자란 10대 초반의 소년들은 하나같이 글을 읽지 못했다. 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에게 직접 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글을 깨우친 소년들에게는 철학까지 가르쳤다. 훗날 혁명정부의 문맹퇴치운동과 무상교육은 그 산속에서 시작됐다.



◆혁명정부에서 '궂은 일' 도맡아◆



혁명에 성공한 과도기 정부는 ‘과거 청산’에 나섰다. 바티스타 정권에서 만행을 저지른 이들의 처벌이 시급했다. 피델은 이 모든 형법절차를 총괄할 인물로 체를 임명했다. 체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동안, 영악한 피델은 정치적 기반을 찬찬히 다져나갔다.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인 체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던 피델은 체를 혁명정부의 사절로 해외순방을 보낸다.



당시 일본에서의 일화는 체의 강직함을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 인사들이 치도리가후치 국립묘지 참배를 제안하자, 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상기시키며 거절했다. 그 대신 일정을 연장해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그러한 언행이 흥미로운 이유는 몇 년 후, 체가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혁명정부는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토지개혁으로 미국 기업의 땅이 몰수되자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61년 4월 17일 미국은 망명 쿠바인들로 구성된 2506여단을 쿠바 남쪽 해안의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다. 소련의 혁명정부는 KGB를 통해 미국의 침략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틀 간의 전투에서 미국은 대패했고 국제적으로 망신당했다.



체는 작은 섬나라를 미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62년 세계를 핵전쟁 초입까지 몰고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의 지적재산권은 체 게바라에게 있었다. 미·소의 막후협상으로 전쟁을 모면할 수 있었지만 타협 과정에서 쿠바는 완전히 배제됐다. 미·소 간 합의에서 미국은 쿠바를 더 이상 침공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미국은 이런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고 지킬 의향도 없었다.



분노한 체는 소련에 대한 배신감을 공개적으로 표출했고, 영국의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만약 핵미사일 제어권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미국을 향해 발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미국인 몇 백만 정도는 희생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히로시마까지 찾아가 평화를 기원한 체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체 게바라를 보는 두 가지 시선◆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반미주의자 체 게바라가 우상화돼있고, 반세기 이상 미국과 교류가 단절 된 쿠바는 미국을 조금도 증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쿠바인들은 보고, 듣고, 먹고, 입는 것 모두 미국산을 좋아한다. 심지어 짝퉁도 미국 브랜드의 것을 선호한다.

“체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단순화시켰어요. 제국주의와는 무조건 싸워야 한다고요?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요. 그런 폭력적인 전체주의가 과연 ‘신인간’들이 사는 자유로운 사회일까요?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Patria o Muerte)? 왜 둘 중 하나야 되죠? 미국으로 이민 갈 자유도 있잖아요.”



내가 머물던 민박집 주인 아들 페페의 말이다. 이처럼 오늘날 쿠바의 젊은이들은 열성당원도 아니고 혁명에 대해서도 은근 비딱하고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인정하는 것은 쿠바 의료복지체계의 근간은 체 게바라의 철학에서 왔다는 것이다.



나 또한 쿠바에서 무상의료 혜택을 받은 적이 있다. 나를 진찰한 안과교수는 예전에 베네수엘라에서 의료봉사를 했다고 한다. 당시 쿠바의료진이 치료한 수많은 환자 중에는 39년 전 체를 사살한 늙은 볼리비아인도 끼어있었다. 원수를 치료해준 체 게바라의 후예들에게 내가 감동하자, 그는 더 진기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 조교는 볼리비아에서 온 여학생이었지. 체가 죽은 바이아그란데 지방에서 가난하게 자란 그녀는 ‘성 에르네스토’ 상 앞에서 매일같이 기도했대. 그 덕분에 쿠바의 의과대학에 무료로 유학 올 수 있었다고 그녀는 믿고 있어.”

물론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체 게바라는 바티칸에서 성자로 인정된 적이 없다. 아니, 무신론자였던 그는 쿠바의 종교인들과 성소수자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해 탄압했다.



“60년대에는 한동안 쿠바에서 영어로 된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어. 비틀스와 롤링스톤스를 몰래 숨어 듣다가 들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 받은 이들이 많았지. 이런 문화정화작업 또한 체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어.”



하지만 일흔이 넘은 하비에의 노모는 아들의 이런 말에 고개를 저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혁명 전 청소부, 재봉사, 미용사 조수 등으로 일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주도한 문맹퇴치운동 덕분에 글을 깨우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어. 공공도서관의 사서로 재직하며 애들을 모두 대학교육 마친 번듯한 엘리트로 키워낼 수 있었지. 내가 평생 서글피 울어본 적은 딱 두 번이야. 한 번은 소련 붕괴 후 찾아온 경제적재난의 ‘특별시기’때였고, 다른 한 번은 1967년 체 게바라가 죽었을 때였지.”



◆변화의 시작은 상상력이었다◆



“진정한 혁명가는 거대한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안내받는다.” 체 게바라가 자주 한 말이다. 그는 혁명의 근원은 사랑이라고 믿었다.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로 단결된 라틴아메리카를 상상했고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한 투쟁에 헌신하는 것으로 그는 생을 마감해야 했다.



몽상가들은 오해와 수모로 상처받고, 절망하고 또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그들의 처절한 노력에도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하는 날도 온다. 1999년 차베스가 집권한 베네수엘라를 시작으로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으로 성난 불길처럼 번진 라틴아메리카의 ‘분홍물결’은 21세기의 대안을 제시했다.



상상력은 변화를 가능케 한다. 많은 이들이 갈망하고 또 반드시 이뤄져야 할 소망은 단순히 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체는 자유를 갈망했다. 체는 삶이란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체가 그토록 혐오했던 자본주의는 그가 죽는 순간부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이제 체는 롤렉스 광고에서부터 할리우드 영화까 끊임없이 재활용된다. 전 지구적인 ‘체 게바라 마케팅’의 숨은 기획자이자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쿠바 정부였다. 체 게바라는 특히 90년대 쿠바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특별시기’에 관광산업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자본주의가 그를 상품화했다면,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를 신격화했다.



67년 10월 18일 백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 체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아바나 혁명광장에 모였다. 피델은 눈물을 머금으며 외쳤다.



“우리 시대가 아닌 미래에 속한 인간 유형을 찾는다면, 한 줌의 얼룩 없는 언행으로 볼 때, 그 유형은 바로 체일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길 바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그들이 체처럼 되길 바란다고!”



오늘날 쿠바의 모든 교실에는 체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학생들은 조회를 마치며, “공산주의의 선구자들이여, 우리는 체처럼 될 것이다!”라고 외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러한 아이들이 자라 의사가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에볼라 퇴치를 위해 아프리카로 주저 없이 떠난 것이다.



◆'소녀 게바라'의 꿈◆



내가 투숙한 민박집 옆 건물에는 훌리아라는 일곱 살짜리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아바나에서 출발하던 날, 줄넘기 연습을 하던 훌리아가 내게 달려왔다. 내가 산타클라라에 간다고 하자 훌리아는 자기도 어른이 되면 체 게바라 기념비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체는 피델과 함께 쿠바를 해방시켰어요. 그리고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죠.”

“우~와 정말? 대단한데! 어느 나라로 갔니?”

“체는 볼리비아에서 싸우다 죽었어요.”

“저런….”

“하지만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체의 사상은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요.”

“그래? 아니 어떻게?”



훌리아는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왼손으로 차례로 가리키며 말했다.



“체의 사상은 우리의 마음과 머리에 살아있으니까요.”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와 숙달된 동작이었지만, 자부심을 갖고 체 게바라에 대해 말하는 훌리아의 표정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렇구나. 그런데 체의 사상? 그게 도대체 뭐니?”



생각에 빠져 머뭇거리던 훌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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