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③ - 명성황후, 무당 신령군(神靈君)에게 미혹되다

온라인 중앙일보 2015.03.21 00:01
[월간중앙] 1948년 간행된 <개벽>,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 소개… ‘진짜 수호신’ 백성의 충성심 외면한 고종 부부의 비참한 말로



고종황제와 명성 황후는 일개 무녀에 미혹돼 국고까지 탕진하는 우를 범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사극 <명성황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고종황제 (이진우 분)와 명성황후(이미연 분). / 사진·중앙포토




1948년 8월 1일 간행된 <개벽(開闢)> 제79호에서는 ‘한말 정국의 이면비사(裏面秘史)’를 특집으로 다뤘다. 8월 15일 정부수립을 앞둔 시점에서 구한말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자는 취지였다. 이 특집에는 ‘한말 정국과 금일의 정세’, ‘독립협회는 왜 패배했나?’, ‘한일병합과 양종의 기문(奇文)’, ‘밤의 여왕 신령군(神靈君)’, ‘한말 풍운의 일타홍, 미쓰 손탁’ 등의 글이 실렸다.



그런데 다른 글들은 제목에서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들과 직결됨을 짐작할 수 있지만 ‘밤의 여왕 신령군’은 특집 취지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쉬 짐작되지 않는다. 우선 밤의 여왕이라 불린 신령군이 어떤 사람인지부터가 생소하다. 게다가 ‘나라 파는 데 한몫 본 요무(妖巫)’라는 부제에서는 구한말 망국의 책임이 신령군에게도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데 정말로 그랬을지 의구심마저 든다.



경기 여주군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 생가. / 사진·중앙포토
그러나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그랬다고 단언한다. 이 글에서는 맨 처음에 “이조는 어찌하여 망했으며, 우리는 왜 식민지의 노예생활을 강제당하게 됐는가?”라고 자문하고, 그 대답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가 외세의 침략정책, 둘째가 부패할 대로 부패해 각성할 줄 모르는 이조 말엽의 실정이었는데 밤의 여왕 신령군이 실정을 대표한다고 했다.



문제의 인물 신령군이 밤의 여왕이 되고 나아가 이조 말엽의 실정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까지는 사연이 많았다. 충주 출신인 신령군은 성이 박이고 이름이 창렬(昌烈)로 가난한 농사꾼의 딸이었다. 시집도 가난한 농사꾼에게 갔는데 팔자가 사나워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다.



홀로 된 박씨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했다. 젊어 남편을 잃은 박씨는 먹고 살기 위해 무당이 됐다. 몸주신은 관우 장군 즉 관왕이었다. 젊고 예쁜데다 말주변까지 뛰어난 무당 박씨는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서 수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들 중에는 무당 박씨의 영험한 힘에 끌린 사람도 있었지만 얼굴과 몸매에 끌린 사람도 없지 않았기에 추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무당 박씨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충주 장호원에서 명성황후를 만났던 것이다.



1882년 6월 10일 창덕궁을 습격한 구식 군병들은 명성황후를 찾아 죽이려 했다.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도망치려던 황후는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궁녀가 입짓으로 황후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황후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틈에 끼여 있던 홍재희라는 이가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실제로 홍재희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재희는 얼른 황후를 들쳐 없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8월 보름 귀경해 귀한 자리에 오른다”



임오군란을 일으킨 훈련도감 군인들의 훈련 모습.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 명성황후는 처음에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한양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충주 장호원에 사는 먼 친척 민응식 집으로 도망갔다. 그때가 6월 19일이었다. 장호원 서북쪽에는 해발 770m의 국망산(國望山)이 있고 이산의 남쪽 산발치에 민응식의 집이 있었다. 황후는 한양에서 온 양반규수처럼 변장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 때는 국망산에 올라 멀리 한양을 바라봤다.



국망산에 오른 명성황후가 한양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한양으로 되돌아갈까 열망했을 것만은 분명하다. 당시 한양은 황후의 정적인 흥선대원군이 장악했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황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가 살아서 입궁할 수 있을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황후는 귀신의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듯하다.



당시 민응식의 집에 신씨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이 마침 무당 박씨의 단골이었다. 명성황후가 먼저 요청했는지 아니면 이 여종이 황후에게 권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여종을 통해 명성황후와 무당 박씨의 만남이 이뤄졌다. 눈치 빠른 무당 박씨는 황후를 한양에서 내려온 귀부인이라 직감했다. 당연히 무당 박씨가 황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말재주를 부렸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무당 박씨는 명성황후를 쳐다보며 “귀인의 관상이 있어 장차 큰 운이 올 것”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는 황후의 말에 무당 박씨는 “이미 말씀 올린 바와 같이 귀인의 상을 하시었고, 지금 계신 이 댁에서 바라다보이는 저 산은 국망산이라 부르며 그 방향이 서북으로 향해 서울을 넘겨다보오니 반드시 8월 보름에 서울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황후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예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국망산의 위치와 명칭을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망산은 황후가 머물던 집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이 방향은 계절로 치면 가을에 해당하고 달로 치면 7월, 8월, 9월에 해당했다. 국망산의 ‘망’은 보름을 의미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를 만나기 전 여종 신씨로부터 황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그 이야기 중에는 황후가 자주 국망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본다는 내용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황후가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터이다. 이런 소망을 짐작한 무당 박씨는 대략 8월 보름에는 한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함으로써 황후의 환심을 사려한 것이 틀림없다. 8월 보름이면 대략 두 달이 남았는데 한양에 돌아가길 소망하는 귀부인이 그 안에 왜 못 가겠는가? 혹 가지 못한다면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또다시 희망 섞인 예언을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무당 박씨는 점이나 굿이 영험한 것 못지않게 눈치 역시 영험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아무튼 무당 박씨의 영험한 예언에 반한 황후는 매일 오라고 간청했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흉허물 없는 사이가 돼갔다.





‘예언’ 덕에 황후와 함께 서울로 입성한 무당



한양도(漢陽圖)에 드러난 북묘의 위치. / 사진·중앙포토
장호원에 머물던 명성황후는 은밀히 고종에게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겼다. 7월 8일 청나라의 오장경이 3천 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남양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어 7월 13일 흥선대원군은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군병들에게 납치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7월 20일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황후가 충주 장호원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병을 파견해 황후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영의정과 제학, 승지, 한림, 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도 모두 가서 황후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경호에 필요한 청나라 군병 100명과 조선 군병 60명도 파견됐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7월 27일.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 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7월 28일 명성황후는 장호원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길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황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경호했다. 29일 용인에서 숙박한 황후는 8월 1일 한양에 입성했다.



무당 박씨는 황후와 동행해 한양에 입성했다. 처음 무당 박씨는 황후가 8월 보름에 환궁한다고 예언 했지만 실제 환궁한 시점은 8월 1일이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틀린 예언이었다. 하지만 황후의 입장에서 며칠 틀린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환궁한다는 예언 자체가 맞았고 날짜도 얼추 맞았다. 그런 무당 박씨를 보낸 것은 하늘의 뜻이고, 또 하늘의 뜻을 전한 무당 박씨는 수호신령이 아니겠는가? 당시 황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무당 박씨를 데려왔을 듯하다.



무당 박씨가 한양에 입성했을 때는 따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황후와 함께 궁궐에서 살았다. 황후는 남들에게 말 못할 온갖 근심걱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무당 박씨가 아픈 곳을 만져주면 고통이 씻은 듯 없어지는 듯했고, 굿을 해주면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러면서 황후의 미혹은 커져만 갔다.



한동안 궁궐에 머물던 무당 박씨는 관우 사당을 지어주면 그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궁궐에 무당이 오래 머물다 보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소문 안쪽에 관우 사당이 건설됐는데 공사는 1882년 연말에 시작돼 1884년 가을에 끝났다. 이 사당은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관왕묘 또는 북묘(北廟)라고 불렸다.



북묘는 고종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건설했다. 고종 역시 황후를 따라 무당 박씨에게 미혹됐던 것이다. 북묘 완성 후 고종은 비문을 몸소 짓기까지 했다. 비문에서 고종은 “어느 날 관우 장군이 나의 꿈속에 현몽하고 또 왕비의 꿈에도 현몽했는데 자상하게 돌봐주는 듯해 자리를 물색해 숭교방 동북쪽 모서리에 사당을 지었다”고 해 북묘를 짓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런데 1929년 간행된 <별건곤> 23호에 의하면 고종의 꿈에 관우 장군이 현몽한 시점은 임오년 봄이었다고 하며, 건장한 사람이 장검으로 고종을 해치려는 순간 관우 장군이 나타나 구해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황후 역시 똑같은 꿈을 꿨다고 한다. 이 꿈이 북묘비는 물론 <별건곤>에까지 실린 것을 보면 꽤 유명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이 꿈을 통해 임오군란 직전 고종과 황후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고종과 황후는 자신들이 임오군란에서 무사히 살아난 이유를 관왕의 보호 때문이라 숭신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고종 눈앞에서 척살당한 민씨 척속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일부 무속인 사이에서 신으로 받들어지는 관우의 사당. / 사진·중앙포토




1883년 10월 21일 고종은 북묘 완공을 축하해 참배했다. 문무백관은 물론 왕세자도 함께했다. 북묘 참배를 위해 창덕궁에서 북묘 사이에 새로 어로(御路)가 닦이기까지 했다. 고종의 북묘 참배는 <승정원일기>에 실리기까지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고종이 천막에 들어가고 잠시 후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천막 밖으로 가소서’ 하였다. 고종이 군복과 갑옷으로 바꾸어 입고 천막에서 나왔다. 찬례(贊禮)가 고종을 인도하여 정문으로 들어가 판위(版位)로 가서 북향하고 서게 하였다. 왕세자도 갑옷을 갖추고 들어와 자리로 갔다. 찬의가 ‘사배(四拜)’라고 외쳤다. 고종이 사배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사배를 행하였다. 마친 후, 찬례가 고종을 인도하여 관우 장군의 신좌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무릎을 꿇으소서’ 하였다. 고종이 무릎을 꿇었다. 도승지 이교익이 향을 받들었고, 동부승지 김낙진이 향로를 받들었다. 고종이 세 번 향을 살랐다….” [<승정원일기> 고종 20년(1883) 10월 21일]



고종의 북묘 참배는 겉으로는 관우 장군 참배였지만 실제는 무당 박씨 참배였다. 북묘의 주인이 무당 박씨였기 때문이다. 고종과 왕후는 북묘의 주인 박씨를 신령군 또는 진령군(鎭靈君)이라 불렀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호신령 또는 수호진령이라는 뜻이다. 설상가상 신령군에 대한 왕후와 고종의 미혹은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1884년 양력 12월 4일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민영익 등 친청파 인사들을 일망타진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한양에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김옥균이 의지하는 일본군은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천여 명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넓은 창덕궁은 적당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종과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 김옥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 공사의 반대로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대신 경우궁으로 바꿨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친어머니인 수빈 박씨(綬嬪朴氏)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에 유리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친청파 인사들을 척살한 후 입궁하기로 계획했다.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 영국 영사, 청나라 상무위원,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과 황후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곳은 불안하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과 왕후는 창덕궁을 떠나 경우궁으로 갔다.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친청파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5일 새벽에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마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갑신정변 겪으며 ‘밤의 여왕’으로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황후는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정변임을 깨달았다. 황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5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황후를 알현했다. 그때 황후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 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과 황후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 공사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듣고 항의 했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6일 오후 고종과 황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이 틈에 왕후는 세자와 세자빈을 데리고 북묘로 도망했다. 왕대비, 대왕대비 등도 모두 무사히 북묘에 모였다. 왕후는 고종에게 글을 보내 속히 북묘로 올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고종은 창덕궁 뒤편의 산속에서 위험에 빠져 있었다. 총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고종은 김옥균과 실랑이를 벌였다. 함께 인천으로 가자는 김옥균의 요구에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대왕대비가 가신 곳으로 가서 죽더라도 한 곳에서 죽겠다”며 버텼다.



하지만 대왕대비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기에 무작정 버틸 수도 없었다. 마침 그때 북묘로 오라는 황후의 글이 도착했던 것이다. 북묘로 가려는 고종과 막으려는 김옥균 사이에 몇 차례 더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더라도 북묘로 가겠다는 고종의 고집을 꺾지 못한 김옥균은 결국 고종을 내버려두고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갔다. 고종은 무사히 북묘에 도착해 가족들을 만났다. 황후와 고종이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가족 모두가 무사히 북묘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수호 신령의 도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믿음을 고종은 북묘 비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앞서 임오년 여름에 군란이 일어나 역도가 대궐을 범하여 재앙의 기미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곧 그들이 해산되어 차례차례 사로잡아 국법으로 처벌했다. 그 후 갑신년 겨울에 또 역란이 일어나 나는 대왕대비, 왕대비, 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 장군 사당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역적의 세력이 커서 놀라운 일이 순간에 일어날 상황이므로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흉도는 잡히고 적병은 도망쳐 피신했던 행차가 무사히 돌아오고 종묘사직이 편안해졌다. 전후에 걸쳐 변고가 생겨 위급할 때 보이지 않게 작용하여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지난날 꿈속에서 만나 장차 자상하게 돌보아줄 듯한 일이 어찌 분명하고 크게 증험된 것이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이후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의 말을 곧 관우 장군의 말로 숭신했다. 명색은 고종이 국왕이었지만 사실상 그 위에 신령군이 있었다. 신령군이 밤에 궁궐에 들어가 하는 말은 다음날 아침 고종의 왕명으로 공포됐다. 신령군에게 ‘밤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령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에게 빌붙으려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관대작과 건달 그리고 부인들까지 별의별 사람이 다 북묘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유인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한양에서 건달 생활을 하던 중 신령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신령군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유인이라는 사람은 귀신을 능히 부리며 풍우도 능히 일으킨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무녀에게 미혹돼 국고 탕진



호기심이 발동한 신령군은 이유인을 초대해 정말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 했다. 그러자 이유인은 “그것은 쉬운 일이나 놀라실까 두려우니 며칠간 목욕재계하신 후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이 건달들을 불러 준비를 마친 이유인은 약속한 날 한밤중에 신령군을 데리고 북악산 깊은 곳으로 갔다. 이유인은 “내가 있으니 두려워 마시오”라고 말한 후 머리동이를 휘두르며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은 현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몸 전체가 청남색이고 키가 10척이나 되는 귀신이 나타났다. 뒤이어 ‘남방적제장군’을 부르니 입에서 붉은 피를 내뿜는 시뻘건 귀신이 나타나 입을 쩍 벌렸다. 혼비백산한 신령군은 귀신들을 쫓아버리라 소리쳤다. 이유인의 명령에 귀신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 귀신들은 건달들이 변장한 것인데 신령군은 진짜 귀신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유인을 자신보다 더 영험한 무당이라 생각한 신령군은 그를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명성왕후에게 뛰어난 인재이자 충성심 높은 인물이라고 추천했다. 1887년 10월 14일 이유인은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법부대신 등 고관대작을 섭렵했다.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황후를 미혹시켜 금강산 1만 2천 봉에 굿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쳐 총 1만2천 석과 12만 냥이 허비됐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결과적으로 볼 때 신령군은 명성황후의 수호신령이 아니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황후와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포로가 됐다. 그 와중에 신령군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투옥됐다. 뿐만 아니라 1895년에 황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렇다면 당시 황후의 진정한 수호신령은 무엇이었을까? 돌이켜보면 그것은 서구의 근대문명과 백성들의 충성심이었다. 황후가 살기 위해서는 또 고종과 조선이 살기 위해서는 서구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고 백성들의 충성심을 고양해야 했다.



그러나 황후는 그보다는 신령군에게 매달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 이유를 <개벽> 제79호에 실린 ‘밤의 여왕 신령군’에서는 “자기의 살 길과 걸어갈 길을 오직 운명에만 맡겨버리는 어리석음 때문”이라 했다.



<대학연의>에서는 이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도술(明道術)’을 제시한다. 인간과 세상의 이치를 밝히 알아 미혹되지 않는 것, 그것이 ‘명도술’이다. 세상에 그 어느 누가 ‘명도술’이 좋은 말임을 모르랴! 그러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인간이라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쉬 미혹되는 인간군상을 통해 ‘명도술’은 좋은 말을 넘어 어렵고도 두려운 말임을 절감해본다.



글=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