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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독일의 큰 정치, 한국의 작은 정치

중앙일보 2015.03.17 00:03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철호
논설실장
축구 발상지인 영국에 “축구란 무엇인가?”란 우스개가 있다. 정답은 ‘11명씩 죽어라 공을 차다 결국 독일이 이기는 스포츠’란다. 독일 축구엔 화려한 개인기가 없다. 대신 탄탄한 기본기와 체력, 무엇보다 조직적인 플레이가 일품이다. 선수들은 이기기 위해 자기 희생을 할 줄 안다. 독일은 피파 랭킹 1위다.



 얼마 전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났다. 그는 G20 재무장관 회의까지 이끌었을 만큼 알아주는 국제통이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감동적 연설’을 물어보았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21세기 들어 단연 으뜸은 2011년 독일 슈미트의 강연”이라고 했다. 93세의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그해 12월 4일, 휠체어를 타고 사회민주당 전당대회에 나가 1시간 동안 연설했다. 제목은 ‘유럽에서 유럽과 함께 하는 독일(Germany in and with Europe)’.



 당시 현안은 그리스 재정위기였다. 독일에는 끝까지 개기는 그리스에 대한 반감이 지배했다. “왜 우리 세금을 정신 못 차리는 그리스에 퍼붓느냐”는 것이다. 기독민주당의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를 도와야 한다는 유로존의 압력과 그리스를 혼내야 한다는 국내 여론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메르켈이 주요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하고 궁지에 몰린 건 당연했다. 대연정의 파트너이자 라이벌인 사민당이 등을 돌리면 정권을 잃을 위기였다. 사민당의 눈앞에 권력이 어른거리는 그때, 사민당의 거물 슈미트가 전당대회에 등장한 것이다.



 슈미트는 “나이가 들수록 멀리 길게 내다볼 수 있는 게 좋다”며 유럽의 수많은 전쟁 역사를 소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동부전선의 기갑사단에서 복무했던 자신의 쓰라린 기억도 끌어냈다. 그러면서 슈미트는 사민당 당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혼자 강했을 때 항상 비극을 불렀다. 지금 독일이 위기에 빠진 유럽 앞에서 힘을 과시하는 건 나쁘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스를 도와줘야 한다!” 한마디로 자신을 따르는 진보 진영을 향해 보수파인 메르켈을 밀어주라는 주문이었다. 그의 강연은 유럽 재정위기의 분수령이었다. 독일 최대 일간지이자 중도보수인 디 벨트는 “역사적인 연설”이란 제목을 뽑았다.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참 이해하기 힘들다. 결정적 시기에 눈앞의 표 대신 독일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 따지기 때문이다. 니더작센의 노조를 기반으로 총리에 오른 슈뢰더는 “배신자”란 비난을 무릅쓰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슈뢰더는 정권을 잃었지만 독일 경제는 그의 ‘아겐다2010’ 덕분에 살아났다. 보수 쪽도 마찬가지다. 메르켈은 진보 진영의 요구를 수용해 원전을 폐쇄하고 최저임금 인상 등 복지를 확대했다. 그는 보수적인 기민당을 설득하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독일에 비하면 한국 정치는 너무 왜소한 느낌이다. ‘집토끼’를 붙잡느라 편 가르기에 골몰한다. 만약 독일 정치를 수입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야당 전당대회에서 문재인 대표는 “우리 형편에 복지 포퓰리즘은 어림없다. 무상보육·무상급식부터 수술하자”고 주문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새누리당 당원 앞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부유층의 세금과 대기업 법인세부터 올리자”고 외칠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고질적 진영논리가 저절로 풀릴 듯한 꿈 같은 장면이다.



 독일의 축구·복지·정치는 공통점이 있다. 엄청 부러우면서도 따라 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독일은 국민 80%가 중산층이며 합리적 중도파다. 유럽통합으로 독일이 최대의 환율 수혜를 입은 만큼 그리스를 도와주자는 주문에 군소리 없이 따른다. 독일 지도자들이 큰 그림을 그리리라 믿기 때문이다. 지난 40년간 4명의 독일 총리가 평균 10년씩 안정적으로 연정을 이끈 비결도 여기에 숨어 있다. 참고로 큰 정치가를 향한 독일인의 애정은 각별하다. 올해 97세의 슈미트는 여전히 골초다. 금연이 엄격한 독일에서 그는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는 엄청난 특혜를 누린다. “지혜로운 슈미트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는 공해가 아니다”는 이유로….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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