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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쏭달쏭 북·중이야기(15)] 김정일과 후진타오

중앙일보 2015.03.16 15:51








1964년 10월 16일 신장 지치구 뤄부포(羅布泊) 사막에 세워진 높이 120m 철탑 위에 중국 최초의 원자탄이 터졌습니다. 오후 3시 섬광과 함께 버섯구름이 일었지요. 오후 5시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인민대회당에서 음악무용극 ‘동방홍(東方紅)’ 출연자 3,000여명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1차 핵실험 성공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이 1958년부터 1964년까지 7년 동안 1차 핵실험에 쏟아 부은 돈이 적어도 40억 달러에 달합니다. 그 당시 중국의 연평균 GNP가 500억 달러에 불과했으니 핵개발 비용이 GNP의 1.5%나 되었지요.



핵무기 개발에 소요된 비용은 공업화와 민간 생활 향상을 위해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재래식 정규군의 장비와 무기 현대화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었지요.



1959년 있었던 펑더화이(1898~1974)와 황커청(1902~1986) 등을 포함한 군부숙청도 핵무기 개발을 위시한 국가 자원의 할당에 대한 지도층 내의 의견 대립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핵무기 개발의 문제는 중국의 군부 및 당을 위시한 권력층 내의 끊임없는 충돌의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지요.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 핵개발을 했지요. 핵개발 할 당시 중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경제난보다 안보를 선택했습니다. 우선 배고픔보다 생존이 더 급했던 것이지요.



저우언라이는 1964년 12월 “우리는 핵실험을 성공했다. 서방인들이 우리를 줄 곧 불러왔던 ‘동양의 늙은이’라는 별명은 이제 떨쳐버릴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은 성공적인 핵실험을 통해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이익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지요.



중국은 실제로 1971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됐고 강대국 정치서열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을 얻은 것도 성공적인 핵실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UN 대표였던 차오관화(1912~1983)는 1971년 11월 26일 UN에서 핵무기에 대한 중국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첫째, 중국은 미·소와 같은 핵강대국의 대열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므로 비핵보유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참가하는 세계회의에서 핵무기의 완전금지 및 폐기의 문제를 검토한다.



둘째, 핵보유국은 이미 중국이 실행한 것 같아 언제 어느 상황하에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셋째, 특히 비핵보유국, 비핵지역, 평화지역으로 설정된 곳에서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



넷째, 외국 영토에 있는 모든 핵기지를 철거하고 핵부대, 핵무기 및 운반수단을 철수한다.



중국이 최초불사용(No-First-Use=NFU)을 선언한 것은 주변국이 불안감을 가져 핵무기 개발을 하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자신이 NFU를 약속함으로써 미국과 소련으로 하여금 같은 약속을 하도록 도덕적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중국은 아슬아슬하게 1960년대 후기와 1970년대 초기에 핵강대국(특히 소련)의 선제공격을 모면했으며 1970년대 후기에 미·중간의 수교로 미국에 의한 핵공격의 가능성마저 줄였습니다.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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