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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의 한국인은 왜] 키 큰 여자, 작은 남자

중앙일보 2015.03.16 00:03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첫 소개팅은 악몽이었다. “여자는 늦게 도착해 남자 애를 태워야 해”라는 친구의 조언을 들은 게 문제였다고 쓰고 싶지만 애꿎은 남 탓할 게 아니다. 모든 건 키가 크게 태어난 내 탓이므로.



 미리 앉아 있던 남자와 즐겁게 차를 마신 뒤 “저녁 먹을까요?”라며 일어날 때까진 세상이 장밋빛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일어섰는데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입 또는 코가 보여야 소위 ‘정상’일 텐데, 눈에 비친 건 정수리. 기자가 더 컸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급속 냉동. “햄버그스테이크랑 치즈돈가스 중 뭐가 더 좋아요?”라던 이 남자, 빛의 속도로 증발했다.



 기자가 모델처럼 키가 큰 것도 아니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 1m70.3㎝(소수점 이하도 소중하다)가 나왔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남자가 줄행랑을 치지 않았다고 한들 치즈돈가스를 냠냠하며 그분과의 달콤한 미래를 상상했을까. 아닐 것 같다. 기자 역시 ‘남자 키>여자 키=정상’이라는 등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검색엔진에 ‘키 큰 여자’를 치면 바로 ‘키 작은 남자’가 연관 검색어로 뜨는 세상이다. 인터넷 질문 코너엔 “저보다 키 작은 남자애에게 고백을 하고 싶은데, 받아 줄까요”라는 고민도 여럿이다.



  키 큰 여자는 때론 타박의 대상이다. “왜 힐까지 신어서 사람 기를 죽여?”라는 말도 종종 듣는다. 그 구두가 예뻐서 신었을 뿐인데. 지금에야 “그럼 플랫슈즈 사 주실래요”라고 농담으로 응수하지만 처음엔 퍽 당황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영어신문 뉴스룸에선 기자보다 작은 외국인 에디터들도 많았건만 8년 넘게 못 들어본 말이기에. 어느 미국인 에디터가 흥분한 표정으로 취재를 지시했던 아이템 중엔 ‘아이 키 10㎝ 키우는 성장판 성형’도 있었다.



 일본에도 키 큰 여자 콤플렉스가 있는 듯하다. 제목부터 ‘러브 콤플렉스’인 만화는 키 큰 여자와 키 작은 남자의 우여곡절 로맨스를 그렸고, 21일 데뷔 25주년을 맞는 싱어송라이터·배우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가 “여성의 입장에서 썼다”는 ‘밀크티’ 가사엔 “키가 큰 점을 (그가) 좋아해 줄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젠 느낀다. 키가 커 보일까 걱정돼 힐을 ‘안’ 신는 게 아니라 발이 아프기 때문에 ‘못’ 신는 나이가 돼서일까. 무엇이 ‘정상’인지에 대한 편협한 고정관념이야말로 비정상이라고. 애당초 ‘작다’와 ‘크다’는 주관적 느낌이다. 주관의 애매한 총량을 객관의 기준으로 삼아 평균으로 강요한다? 키 작은 남자보다 46억 배 더 매력 없다.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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