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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민 스님의 여운이 있는 만남] 한비야씨와 함께

중앙일보 2015.03.13 00:18 종합 26면 지면보기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면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는 게 한비야씨와 혜민스님 두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지금 소소한 내 삶 속에 있다. 두 사람이 중앙일보사 건물 옥상에 섰다. 사진=김경빈 기자


한비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처음 뵙는데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촌누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말해 보면 금방 편해지고 왠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 편이 되어서 응원해 줄 것 같은 그런 사람. 밝은 표정과 생기 있는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긍정의 파동은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잠도 하루에 4시간씩만 잔다고 하던데 도대체 그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지 그것이 가장 먼저 궁금했다.

"검색 말고 사색해야죠, 그래야 휩쓸리지 않아요"



- 한비야 선생님 유년기 이야기부터 좀 듣고 싶어요.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을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하셨나요.



 “저는 1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어요. 언니 둘은 굉장히 예뻤어요. 보통 셋째 딸이 제일 예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은 아니에요. 사람들이 우리 큰언니를 보면 ‘와, 예쁘네’, 작은언니를 보면 ‘작은딸도 공주 같네!’, 그러다 셋째 딸인 저를 보면 ‘음… 똘똘하게 생겼구나’ 하는 거예요. ‘공주’인 언니들은 심부름을 잘 안 해서 ‘무수리’인 제가 동네 심부름을 도맡아 했어요. 전화가 귀한 시절, 우리 집에 전화가 있었는데, 동네 다니면서 ‘누구네 집에 전화 왔어요’ 하는 소식통 역할을 했어요. 어찌 보면 그게 제 첫 번째 NGO 활동이었죠.” 



 - 남다른 친화력이 어린 시절 경험을 통해서 생기기 시작한 거네요.



 “동네 분들이 우리 집 전화를 써야 하는데 언니들이 있으면 안 들어오지만, 제가 있으면 편안하게 들어와서 전화하셨어요. 심부름을 잘하니까 저에게 과자도 사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죠.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들은 예뻐서, 혹은 다른 일을 잘해서 주목받았다면 저는 저만의 방법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자존감도 높였던 거죠.”







 - 부모님에겐 어떤 영향을 받으셨나요.



 “부모님은 우리를 세계를 무대로 삼는 아이로 키우고 싶으셨어요. 그래서 집 구석구석에 커다란 세계지도를 붙여 놓으셨죠. 그래선지 저는 한 번도 세계가 넓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세계지도를 보고 자란 덕분에 세계일주를 꿈꾸게 되었고 세계일주를 한 덕에 국제구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저는 특히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산을 좋아하는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등산을 통해 저의 자존감을 한껏 키워 주신 것 같아요. 산에 가면 제가 제일 꼬마니까 어른들이 말하죠.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아이고 기특해라, 참 장하다.’ 이런 관심과 칭찬들이 나 자신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어요. 돌아보니 제 무한긍정 DNA는 이때 만들어진 것 같아요.”



 세상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내 존재 자체로 이미 사랑받을 만하다고 느끼는 것. 나는 이런 자존감이 지금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문기자셨던 아버지는 매일 일기를 쓰셨어요. 그 습관을 제가 물려받았고요. 아버지는 제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셨지만 무형의 막대한 유산을 남겨주신 거죠. 세계지도, 산, 일기. 이 세 가지가 지금까지도 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요.”



 -최근 근황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요 몇 년 어떻게 지내셨나요.



 “2009년 미국 터프츠(Tufts) 대학으로 유학 가서 ‘인도적 지원학’ 석사학위를 마치고 2011년부터 3년간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으로 유엔 정책자문에 응했어요. 2012년부터는 일년에 반은 이화여대에서 국제구호 강의를 하고 나머지 반은 아프리카·필리핀 등 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일은, 지리산 천왕봉에서부터 금강산 향로봉까지 백두대간을 50구간으로 나누어서 2년 만에 완주한 거예요.”



 - 그 많은 일을 하시는데 시간 관리하시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까.



 “전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하려고 해요. 이름하여 ‘아궁이론’이죠. 열 개의 장작이 있는데, 그 장작을 열 개의 아궁이에 한 개씩 넣는다면 솥을 미지근하게는 하겠지만 물을 끓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 아궁이에 제가 가진 장작 10개를 몽땅 넣어요. 그러고는 그 일이 끝날 때까지 그 일에만 집중해요.”



 한비야씨 역시 과거에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본 적이 많았지만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은 구호활동을 할 땐 구호활동에만 집중하고, 강의를 할 땐 강의만 생각하고, 산을 탈 땐 산만 본다. ‘세상일을 다 잘할 수도 없고 다 잘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쉰이 넘은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된 까닭을 물었다.



 - 쉰이 넘어서 해외 유학 결정을 하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오랫동안 구호활동을 하다 보니 위에서 내려오는 정책이 현장 상황과 잘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구호를 받는 사람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주는 사람 입장만 생각해서 만든 정책들이 많았어요. 현장 근처에도 안 와본 사람들이죠. 계속 ‘이건 아닌데, 저것도 아닌데…’ 투덜대기만 했어요. 그러다 ‘이렇게 불평하는 것도 지겹다! 내가 직접 정책 공부를 해보자!’ 그래서 대학원을 간 거예요.”



 -배우던 학생에서 이젠 가르치는 선생님의 입장이 되셨는데요,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보면 어떤 생각을 많이 하시게 되나요.



 “많은 젊은이가 내게 이렇게 말해요. 자기 꿈이 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요. 이런 친구들에게 저는 ‘검색하지 말고 사색하라’는 말을 자주 해요. 사색 없이 인터넷 검색부터 하면 다른 사람들 생각을 먼저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이 말 저 말에 휩쓸리면서 정작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생각할 시간도 여유도 힘도 사라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휴대전화를 꺼놓고 하루에 10분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권해요. 그 시간에 일기를 쓰면 금상첨화죠. 일기를 쓴다는 건 그날 하루에 대한 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면서 동시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죠.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는지,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즐겁고 행복한 사람인지 알 수 있거든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최근에 본 나라별 행복지수와 관련된 보고서 내용이 생각났다. 집단주의가 강한 우리나라나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 유럽에 비해 행복지수가 낮다는 결과에 대한 분석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개인들이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면서 정작 자기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는 선생님의 새 책 『1그램의 용기』에서 가장 공감됐던 부분이 ‘행복을 큰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것에서부터 찾자’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공짜다’라는 말씀은 참 좋은 깨달음인 것 같아요.



 “삶의 소소한 행복이 쌓이고 모여야 비로소 큰 행복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요. 저는 아름다운 노을이나 보름달을 보게 되면 남들이 호들갑을 떤다고 할 만큼 좋아해요. 아침에 밀크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북한산에 올랐다가 따뜻한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비빔국수 한 그릇 먹을 때마다 정말로 행복해요. 제가 행복해지는 데는 단돈 2만원이면 충분하더라고요.”



 한비야씨가 말하는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가 유학 생활을 시작하며 다짐한 일기의 한 부분을 보면 이렇다. ‘내가 여기에 전교 1등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내 생각의 뿌리가 깊어지면 그만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100점을 맞아야만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행복할 자격을 너무 높게 잡고 있다.



 “누가 내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장 공책과 연필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러고는 오늘 하루 가장 행복했던 순간, 혹은 감사한 순간을 적어보라고 할 거예요. 처음에는 그런 순간이 있나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반드시 떠오를 거예요. 소소할수록 좋아요. 습관적으로 쓰다 보면 감사할 일과 행복한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이렇게 조금씩 일상의 작은 행복을 감지하는 촉과 행복의 잔 근육을 키워가면 되는 거 아닐까요?”



 한비야씨는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종교인으로서의 한비야씨에 대해 궁금해졌다.



 -외할머니가 스님이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북한산을 자주 갔던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외할머니가 대성사라는 절에 계셨기 때문이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 절밥도 많이 먹고, 보살계를 받은 적도 있어요. 아직까지 천수경을 줄줄 외운답니다.”



 -현장에서 세상의 부조리와 기막힌 아픔을 직면하다 보면 종교인들이 신앙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어요. 한비야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여행가가 아닌 긴급구호팀장으로 2002년 아프가니스탄 긴급구호 현장에 갔을 때 저도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극심한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내가 믿는 자비의 하느님이 만물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이 아이의 하느님이기도 한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이 아이는 보이시지 않는 걸까? 화가 났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지금 가장 마음 아픈 분은 하느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고 신심이 깊어지면서 그의 기도는 부탁과 투정에서 점차 감사와 사랑 고백으로 변했다고 한다.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오니 계획하신 대로 하시옵소서. 순종하겠나이다’라는 기도의 맺음 역시 그 뜻이 더 깊게 다가온다고 한다.



 -『1그램의 용기』는 선생님께서 6년간 일기를 응축해 뽑은 메시지라고 들었습니다.



 “용기를 내려는 사람에게는 1그램의 용기면 충분합니다. 가능성과 두려움이 50대50으로 팽팽할 때, 하고 싶은 마음과 망설이는 마음이 대등하게 줄다리기를 할 때 그런 분들에게 1그램의 용기를 보태고 싶어요.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잖아요. 할까 말까 할 때 ‘해 보자’ 하는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 길이 생깁니다. 우리는 이미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기 안에 답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실행에 옮길 1그램의 마지막 촉매제가 부족한 거죠. 저 역시 그 한 걸음을 내딛도록 격려해준 주변의 목소리, 그분들이 보태준 1그램의 용기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요. 제가 받은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아침햇살처럼 따뜻한 1그램의 용기를 보태 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삶을 이끌어 가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즐겁고 자유롭게! 이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행복이 아니라 힘들지만 재미있는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집중하고, 그로 인한 결과도 고스란히 책임지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나 좋아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까지 된다면 최고 아닌가요?”



 우물 앞집 셋째 딸에서 세계를 무대로 긴급구호 활동을 하면서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밝고 긍정적인 한비야씨를 보면서 오늘도 나는 배운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은 내가 먼저 행복해지는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 행복은 먼 곳이 아닌 지금 소소한 내 삶 속에 있고, 남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물어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비야는…



NGO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을 그만두고 6년 전 미국으로 떠났다가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세계시민학교 교장, 유엔 자문위원으로 돌아왔다. 홍익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대에서 국제홍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잘나가던 국제홍보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오지여행가로 나섰다가 국제난민운동가로 변신했다. 현재는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저서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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