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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뽑았는데 … 어정쩡한 큰손, 국민연금

중앙일보 2015.03.13 00:02 경제 1면 지면보기


연기금의 기업 경영 참여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걸까, 아닐까. 11일 국민연금이 현대모비스와 기아자동차 사외이사 2명에 대한 재선임안에 반대하기로 한 결정이 재계와 시장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의결권 적극 행사 나설 경우
기업 경영 위축 이어질 우려
모비스·기아차에 대해서도
사내이사에겐 판단 유보



 국민연금 주식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는 이날 현대자동차 등의 정기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심의하고 현대모비스와 기아자동차의 사외이사 2명의 재선임안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지난해 9월 있었던 현대차그룹 컨소시엄(현대차·현대모비스·기아차)의 한전부지 매입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한국전력 부지 매입 가격이나 매입 결정의 적정성을 두고선 격론을 벌인 끝에 기업가치가 훼손된 건 분명하지만 그 정도는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면서 한전 부지 매입과 관련된 현대차그룹 이사 7명 가운데 사외이사 2명에 대해서만 경영진에 대한 감시·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재선임에 반대하기로 했다. 대신 사내이사는 경영의 안정성을 고려해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결정은 사실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기업에서 주요 결정을 하는 인사는 경영진, 즉 사내이사다. 그런데 위원회는 한전부지 인수 결정을 한 사내이사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감시·감독 등 보조적 역할을 하는 사외이사에게만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만약 주주가 경영진의 잘못된 결정으로 주주가치가 훼손됐다고 판단했다면 당연히 경영진에게 먼저 책임을 물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왜 위원회는 이런 어정쩡한 결정을 내린 걸까. 국민연금 관계자는 “이번에 내린 결정 그대로만 봐달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을 한 배경엔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할 고민이 담겨 있다. 당초 국민연금은 이번 주주총회 시즌부터 의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할 계획이었다. 지난해 정부는 침체된 경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의 하나로 배당 확대를 유도하는 정책을 폈다. 국민연금이 기업 명단을 만들어 투자기업에 배당 확대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고 연기금이 기업의 배당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해도 경영참여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도록 자본시장법 시행령도 고쳤다.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는 순풍에 돛 단 듯 진행됐다.



 하지만 지난달 26일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는 올해 첫 회의에서 국내주식 배당 관련 추진방안을 보류했다. 일부 위원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고 제동을 걸면서 추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국민연금이 배당이 적은 기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의결권을 강화하려던 계획은 일단 이렇게 무산됐다.



 사실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연금 가입자 입장에선 국민연금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투자 기업에 배당 확대 등을 적극 요구해야 하지만 자칫 이런 의결권 강화가 기업의 경영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증시에서 ‘큰손 중의 큰손’이다. 지난해 국내 증시 투자금액이 84조원에 달했다. 지분 5% 이상 보유하고 있는 상장사만 260개를 넘어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민연금이 현실적으로 쓸 카드는 다양하지 않게 됐다. 시장에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기업 경영진에 ‘주주환원과 투명 경영을 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의결권 행사를 제한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과도하게 경영에 간섭할 것이라는 우려는 사그라들겠지만 배당 압박은 커질 것”이라며 “이번에 배당 지침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난해보다는 더 많은 배당을 요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민연금은 2060년 기금 고갈이 예상된다. 기금 수익률을 매년 1%포인트만 높이면 기금 고갈시점을 8~9년가량 늦출 수 있다. 수익률을 적극적으로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창규 기자 teente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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