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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주베일항 9억 달러 계약금이 국가부도 막았다

중앙일보 2015.03.10 01:23 종합 4면 지면보기
‘건강한 몸으로 김포에 내리자.’


해외건설 50년, 신성장 50년 <상> 한강의 기적 마중물
대한민국 반세기 견인차
오일쇼크로 경상 적자 6.6배로
혹독한 사막공사 따내 달러 공급
한국건설 신화, 뉴스위크 1면 장식
중화학·자동차·전자 발전 이끌어

 1989년 아프리카 사하라사막 한복판에서 벌어진 리비아 대수로 공사장 곳곳에 세워진 한글 팻말이었다. 사막 모래는 무거운 덤프트럭엔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살을 태울 듯한 태양과 살인적인 갈증과도 싸워야 했다. 그렇다고 향수를 달랠 선술집조차 없었다. 선진국 근로자는 혹독한 근무조건 때문에 손사래를 쳤다. 자금력도 기술력도 열세였던 한국 건설회사가 중동시장을 뚫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영어로 된 공사 지시서를 줄줄 읽어낼 수 있으면서도 개미처럼 부지런한 근로자가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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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오일쇼크 직후인 74년 한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억2270만 달러에 달했다. 1년 만에 6.6배로 불어났다. 변변한 수출품도 없었다. 달러를 구해오지 않으면 국가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한국 경제를 구한 건 해외 건설이었다. 60년대 태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건설공사 경험을 쌓은 국내 건설사는 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자 중동으로 향했다. 첫 테이프는 삼환기업이 끊었다. 73년 12월 따낸 알룰라~카이바 고속도로 건설공사로 2400만 달러를 수주했다.



 76년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은 계약금액이 9억4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정부 예산의 25%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운도 따라줬다. 76~81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당시 10m 높이의 철골구조물을 바지선에 실어 1만6000㎞ 거리에 있는 사우디까지 19번 왕복했다. 보험도 안 들었는데 태풍을 딱 한 번 만났을 뿐이다. 당시 중동에서 일했던 고영회(57) 대한변리사회 회장은 “철근을 묶는 데도 한국인은 독창적인 결속법을 만들어냈다”고 회고했다. 77년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 해외 건설 노동자 등이 그려진 그림을 ‘한국인이 오고 있다’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 장식했다.



 해외 건설 경험은 국내 고속도로·발전소·제철소·댐 같은 기간 시설을 짓는 데도 밑거름이 됐다. 8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 발전에도 해외 건설이 모태 역할을 했다. 건설사가 해외에서 수주해온 각종 플랜트 설비 공사가 국내 중화학공업 회사에 특수를 안겨줬다. 해외 건설 덕에 일어선 중화학공업은 70년대 연평균 20%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하며 80년대 자동차·전자업종 성장의 견인차가 됐다.



 ‘지지 않는 태양’ 같았던 중동 특수도 81년 유가 하락을 기점으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중동 국가들이 공사를 줄이기도 했지만 국내 기업도 플랜트 설치 등 기술 중심 공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해외에서 제 살 깎기 식 저가 수주 경쟁도 수익성을 갉아먹었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 교수는 “해외 건설은 70년대 노동 집약적인 산업 특성을 이용한 수출 히트 상품이었다”며 “80년대 물가를 잡으면서 ‘3저 호황(원유·달러·금리)’을 누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세종=김민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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