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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터미널' 아프리카 국적 20대 남성 6개월간 고군분투

중앙일보 2015.03.08 17:37
A(23)씨가 아프리카에서 도망치듯 나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날은 2013년 11월 20일이었다. 인종ㆍ종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고국 땅에 있다간 정부군에 강제 징집돼 동족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할 게 뻔했다. A씨는 입대 통보 다음날 고국을 등지기로 결심하고 브로커를 만났다. 브로커가 건넨 단기상용 목적의 사증에는 난생 처음 보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적혀있었다.



중국ㆍ홍콩을 경유해 꼬박 이틀 걸려 한국에 도착했지만 인천공항의 벽이 그리 높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A씨는 난민인정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심사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단박에 입국을 불허했다. 쫓겨날 위기에서 난민지원센터의 도움으로 공익법센터 어필의 이일 변호사와 연락이 닿았고, 며칠 뒤 서울행정법원에 난민인정심사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날부터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처럼 A씨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공항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는 달랐다. A씨는 입국불허처분에 따라 소송 기간 공항의 송환대기실에만 머물러야 했다. 이 변호사와 거의 반년 간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공중전화를 통해 소송을 상의했다고 한다. 인천공항이 제공하는 치킨버거와 콜라로 겨우 끼니를 때웠다.



공항에서 기거한 지 5개월 만인 지난해 4월에서야 A씨는 송환 대기실에서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인신보호 청구소송에서 승소했다. 대기실에서 나와 면세점까지 왕래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이어 한달 뒤에는 정식으로 “난민 심사 기회를 주라”는 법원 판결을 받아 들었다. 인천지법 행정2부는 “A씨의 진술 일부가 일관성이 없긴 하지만 사실을 은폐해 난민인정을 받으려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부족하고, 징집 거부로 인해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보면 명백히 이유 없는 신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불회부 결정은 재량을 일탈ㆍ남용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밝혔다. 2013년 7월 난민법이 시행된 뒤 난민인정심사 불회부 결정이 위법하다고 판단한 첫 판결이었다.



A씨는 “당시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이 변호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공항을 나온 뒤에도 A씨의 소송은 계속 이어졌다. 서울고법이 지난 1월 말 난민 심사조차 받지 못하게 한 당국의 처분이 위법하다고 1심 그대로 판결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실을 봤다. 이 판결은 당국이 상고를 포기해 최근 확정됐다.



A씨는 지난달 10일 마침내 정식 난민 심사를 신청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지 1년3개월 만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심사 신청 기회를 얻었을뿐 난민으로 인정받을수 있을진 미지수여서 A씨는 여전히 불안해 한다고 이 변호사가 전했다.



이 변호사는 “난민인정심사 회부 제도는 난민제도를 악용하려는 경우에 대비해 만들었는데 현실에선 난민 신청자에게 난민인정 심사 기회조차 주지 않아 입법취지와 동떨어져 있다”며 “ ‘갑’의 입장에서 내리는 입국심사관의 위험한 심사관행은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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