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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삼대를 가는 비결은 '패밀리 오피스'

중앙일보 2015.03.05 17:49
지난해 7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자산 10억 달러(1조1000억원) 이상인 미국의 부자 가문 순위를 발표했다. 1위는 월마트를 운영하는 월튼가였는데 총 자산은 1520억 달러에 달했다. 이 명단에서 눈에 띄는 건 정치 명문인 케네디가였다. 자산 10억 달러로 179위를 차지했다. 케네디가는 자손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비운을 겪었다. 세금의 공세도 만만찮았다. 여기에다 현재 큰 사업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케네디가가 재산을 지켜왔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포브스는 “케네디가가 재산을 까먹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건 미로와 같은 신탁의 보호 때문"이라고 했다. 케네디 집안 재산의 상당액은 신탁에 묶여 있다. 신탁에 돈을 맡겼다고 그 돈이 반드시 지켜지는 건 아니다. 잘 관리해야 한다. 케네디가가 부를 지킬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패밀리 오피스(family office)'인 ‘조셉 케네디 엔터프라이즈’에 있다. 케네디가의 비조(鼻祖)이자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아버지 조셉 케네디가 1927년 설립한 회사다.



부자 혼자서 엄청난 재산을 관리하고 지키는 건 힘들다. 때문에 창업주는 자신의 가치관을 받들어 가문의 유·무형 자산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전문 업체가 필요하다. 이게 패밀리 오피스다. 가문의 자산배분, 상속·증여, 가업 승계, 세금 문제 등을 관리해 가문의 부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대부분 자선 재단의 형태로 활동하지만 종종 자산운용사나 헤지펀드 형태를 띄기도 한다.



패밀리 오피스의 기원은 왕실의 자산과 집안 업무를 총괄하는 집사 사무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 유럽의 부유한 상인 가문이 설립한 개인 은행과도 맥이 닿아 있다. 18세기 유럽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실물 자산과 인적·지적 자산을 지키는 총체적 업무를 담당했던 집사에서 시작됐다는 분석도 있다.



패밀리 오피스는 19세기에 들어와서 구체적인 모습을 띄었다. 1838년 금융재벌인 모건가가 ‘하우스 오브 모건’을 설립했다. ‘패밀리 오피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건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다. 1882년 만든 ‘록펠러 패밀리 오피스’가 공식적인 첫 패밀리 오피스다. 유럽 귀족가문은 20세기 초반에 패밀리 오피스와 유사한 ‘에스테이트 오피스’라는 기구를 세웠다.



패밀리 오피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집안의 자산을 대대손손 안정적으로 지키는 것이다.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다. 부호의 재산을 잠식하는 위험 요소는 많다. 상속은 가장 큰 위험 요인이다. 후손들에게 자산이 나뉘고 세금도 내야 한다. 무능하고 씀씀이가 헤픈 후손에게 재산이 넘어가면 모두 날릴 위험도 크다. 이혼이라는 변수도 있다. 부의 이전 과정을 분석한 로이 윌리엄스는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가문의 자산은 3대를 거치면 점차 작아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부의 수성(守城)이라는 측면에서 패밀리 오피스는 효과적이다. 20세기 초반에 미국에서 가장 부유했던 멜론가와 록펠러가는 신탁 등의 모습을 띤 패밀리 오피스의 보호 속에 ‘눈에 띄지 않게’ 재산을 지키고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멜론가의 재산은 120억 달러(19위), 록펠러가의 재산은 100억 달러(24위)에 이른다. 포브스는 “패밀리 오피스는 무능한 상속자로 인해 재산이 줄어드는 것을 막는 데 효과적인 장치”라고 설명했다. 패밀리 오피스의 신탁을 ‘왕조의 신탁’이라 부르는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도 개인 자산을 운용하는 캐스캐이드인베스트먼트를 운영하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도 지난해 개인자산을 관리하는 패밀리 오피스를 만들었다.



한 가문에만 충성을 다하던 패밀리 오피스가 최근에는 여러 고액 자산가를 고객으로 둔 기업형 모델로도 발전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정보기술(IT) 분야 개척과 셰일가스 붐으로 돈방석에 올라 앉은 신흥갑부가 급증하면서 여러 가문의 자산을 운용하는 ‘멀티 패밀리 오피스’가 성업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다 보통 1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가 가입하던 문턱이 2000만 달러 정도까지 낮아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에서만 4000~5000여 개 패밀리 오피스가 영업을 하고 있다. WSJ은 “패밀리 오피스가 받는 연간 수수료는 운용자산의 0.25~1%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체계적인 서비스로 무장한 기업형 패밀리 오피스가 등장하면서 서비스 영역도 확대되고 있다. 재산 관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21세기 집사 서비스’라고 할 만큼 가문의 모든 것을 챙긴다. 절세 전략과 부동산 투자 및 운용 등 자산 관리, 법률 및 의료서비스, 진학과 유학 문제 등을 포괄하는 교육 서비스는 기본이다. 개인 요트나 항공기 구입과 관리, 품격있는 문화 생활 가이드, 쇼핑 등과 관련한 컨시어지 서비스도 제공한다.



금융 당국의 감독을 피하기 위해 헤지펀드가 패밀리 오피스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헤지펀드와 달리 패밀리 오피스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하지 않아도 된다. 조지 소로스는 2011년 자신이 운용하는 퀀텀펀드에 들어 있는 외부 투자금을 모두 돌려주고 퀀텀펀드를 소로스 일가 자산을 관리하는 패밀리 오피스로 전환했다. SAC 창업자인 스티브 코언도 SAC를 패밀리 오피스로 바꿨다. 한국에서 패밀리 오피스 산업은 초보단계다. 가족재단 등을 설립하거나 신탁에 가입할 때 세제혜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서히 사업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2012년부터 삼성증권과 신영증권 등이 패밀리 오피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민주 회장의 ‘에이티넘파트너스’가 대표적인 한국형 패밀리 오피스로 꼽힌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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