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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히터'라고 쓰고 피아노의 전설이라 읽는다

중앙일보 2015.03.05 00:23 종합 22면 지면보기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수수께끼’ 중 한 장면. 기교파인 동시에 서정적인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다. [사진 풍월당]
“아무리 들어도 리히터밖에 없더라.” 음악평론가 정만섭씨가 지난달 28일 한 강의에서 내린 결론이다. 전설적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1915~97)의 탄생 100년을 기념한 강의로 서울 신사동 음악감상실 ‘풍월당’에서 열렸다.


국내외서 탄생 100돌 재조명 열기
바흐부터 현대음악까지 두루 연주
싸고 다양한 음반 박스세트 쏟아져

 정씨는 역사적 연주자부터 신인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KBS클래식FM(93.1Mhz)에서 ‘명연주 명음반’을 진행한다. 수많은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었지만 결국 한 명, 리히터로 돌아오게 됐다는 뜻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리히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 열기가 뜨겁다. 강의는 물론 음반 박스가 잇따라 출시됐다. 우선 지난해 말 51장짜리 박스세트가 유니버설 뮤직에서 출시됐다. 음반사 데카·필립스·도이치그라모폰의 모든 녹음을 모은 박스다. 또 올 1월엔 4장짜리 바흐의 평균율 전집(소니), 18장짜리 박스(RCA·컬럼비아)가 나왔다. 1960년의 첫 미국 연주 음원이 최초로 CD에 담겼다.







 애호가들의 반응도 좋다. 음반매장도 운영하는 풍월당의 최성은 실장은 “지난해 말부터 리히터에 대해 문의하는 고객이 많다”며 “전설적 연주를 박스세트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고, 무엇보다 리히터에 대한 청중의 애정이 식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음반 박스세트는 51장짜리가 19만원, 18장 6만8000원, 4장 3만6000원대다. 저렴하게는 한 장에 3700원대다.



 피아니스트로서 리히터는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다. 보통 피아니스트들은 자신과 잘 맞는 작곡가의 작품 연주로 유명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리히터는 특정 작곡가나 시대와 연관짓기가 어렵다. 17세기의 바흐부터 20세기 프로코피예프까지, 연주하는 족족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연주 곡목도 방대해 수많은 녹음을 남겼다.



 주관이 뚜렷한 음악 해석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독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청중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 정만섭씨는 “생각을 하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라며 “연주의 매 부분에 생각과 의미를 담았기 때문에 듣고 나면 공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 소나타 21번의 2악장은 지나치게 느리지만 듣고 나면 이해가 된다”고 덧붙였다.



 인생은 드라마틱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2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는 독일계라는 이유로 러시아군에게 총살됐다. 리히터는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그의 명성은 차츰 미국·서유럽으로 입소문이 났고, 스탈린 사망 후인 1960년 역사적인 미국 연주를 열었다. 이후 세계 음악계를 장악하다시피 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리히터의 연주에 대해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황홀경”이라고 표현했다. 이처럼 독보적 피아니스트지만 아직 CD로 나오지 않은 음원이 많다. 워낙 녹음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리히터 추모 열풍이 짧지 않을 듯한 이유다.



김호정 기자

[영상 1977년 영국 올드버러 음악제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8번 G장조, D. 894 Op.78 연주하는 리히터. 유튜브 Ola Løkken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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