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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고백 꽃, 군인 휴대폰, 유서 … '서민의 삶' 내 안에 있죠

중앙일보 2015.03.02 00:56 종합 16면 지면보기
서울 지하철 2호선 대림역에 있는 물품보관함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물품보관함엔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상이 담겨 있다. [신인섭 기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사건:텔링]
하루 평균 5000명, 연 180만 명 이용
아기 시신 두고간 젊은 여자도 있어
피싱에 속은 노인 수천만원 넣기도
"피 흐른다" 신고에 열어보니 김치
애인 줄 야식 놓고 가는 연인 늘어
강남역엔 토익·토플 교재 많이 나와



 최승자 시인은 ‘삼십세’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서른이란 세상 이치를 깨닫게 되는 나이라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그냥 살자니 고통스러운 세상사를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이렇게 죽어 사라지자니 책임지고 있는 일들이 적지 않은 나이.



 시간은 참으로 무심한 것이어서 저도 어느새 서른이 됐습니다. 1985년 8월 27일이 제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날이니까요. 저는 서늘한 지하철역에서 30년을 가만히 서 있기만 했지요. 그간 저를 찾아온 사람은 약 5400만 명에 이릅니다. 하루 평균 5000명 남짓, 연간 180만 명의 사람들이 저를 찾아와 무언가를 보관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물론 제가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한자리에 서서 30년간 변화해 온 한국 사회, 한국인들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겁니다.



 맨 처음 제가 세상에 나온 85년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당시 한 레저업체가 일본 업체와 기술제휴로 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상이 온통 들떠 있던 시절. 신문과 방송은 저를 찾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늘 것이라 떠들어댔지요. 지하철 노선이 1~3호선뿐이었던 당시엔 서울 시내 지하철역에 약 2000개 설치됐지만 노선이 9호선으로 늘어난 요즘엔 약 7500개가 ‘지하철 물품보관함’이란 명찰을 달고 지하철역을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는 그야말로 ‘보관함’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습니다. 회사 업무가 바쁜 직장인들이 서류 봉투를 넣어두거나 서울을 찾은 관광객들이 잠시 짐을 맡기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최근 들어 저는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저를 찾아오면 식은땀부터 흘러요. 아, 저 어르신도 보이스피싱에 당하셨구나….



 범인들은 어르신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검찰청인데 어르신 계좌가 범죄에 사용됐으니 얼른 돈을 뽑아서 OO역 O번 물품보관함에 넣어두세요. 그럼 안전하게 돈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런 사기 전화에 속은 노인들은 손을 벌벌 떨면서 수천만원이 든 종이봉투를 제 안에 놓고 황급히 사라져요. 그러면 젊은 남성 2~3명이 나타나 이 봉투를 회수해 가죠. 전 재산을 순식간에 잃은 사람들이 텅 빈 제 속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우는 모습을 보면 그 나쁜 놈이 누군지 말해주고 싶지만…. 저 역시 그저 눈물을 삼켜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눈으로 보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들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2011년 5월 지하철 7호선 신풍역에서 있었던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초여름을 앞둔 5월 무렵. 스무 살쯤 된 앳된 얼굴의 여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여행용 가방 하나를 제 안에 넣어두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다시 가방을 찾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규정에 따라 보관 기한이 평균 4일이 넘어가면 제 안에 보관된 물품은 장기 보관품 창고로 옮겨지게 됩니다. 여자의 가방도 그랬지요. 그런데 장기 보관품 창고에서 분류 작업을 하던 인부들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왔습니다. 여자가 두고 간 가방에서 심하게 부패된 영아의 시체가 발견된 겁니다. 여자는 경찰 조사에서 “아이를 키울 경제적 능력이 없어 경기도 안양의 한 모텔에서 아이를 낳아 숨지게 한 뒤 물품보관함에 넣었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지난해에 저를 찾아온 중년 남자도 기억납니다. 수척한 얼굴에 그늘이 짙었던 남자는 종이 한 장을 넣어두고 사라졌어요. ‘더 이상 버텨낼 경제적 여력이 없다. 세상을 떠나겠다’는 내용의 유서. 뒤늦게 이를 발견한 관리업체 직원이 수소문했지만 이 남자 행방은 여전히 알지 못합니다. 부디 마음을 고쳐먹고 꿋꿋이 세상을 살아내고 계셔야 할 텐데….



 예전과 달리 요즘엔 빈곤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저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지난해 6월께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한 달 넘게 찾아가지 않는 보따리를 관리업체 직원이 수거해 갔어요. 평균 4일 정도 찾아가지 않는 물품은 ‘장기 보관물품’으로 분류, 물품보관센터로 이송돼 보관됩니다. 이를 최대 한 달까지 보관한 뒤 찾아가지 않으면 폐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물품보관센터에 보관된 보따리 주인이 폐기 직전 전화를 걸어온 겁니다. 20대 여성이었어요. “가방 안에 든 아기 분유가 필요한데, 추가요금을 낼 돈이 없어서 가방을 못 찾았어요.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가난에 쪼들리던 그녀는 찜질방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찜질방에 짐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 보관함에 넣어뒀다고 했어요. 그녀가 놓고 간 낡은 가방 두 개에는 남루한 아기 옷과 분유가 있었죠. 관리 직원은 보관료와 운송비를 받지 않고 찜질방으로 가방을 돌려보냈다고 해요.



 요즘 젊은이들은 저를 연애 이벤트용으로 종종 활용하기도 해요. 좋아하는 여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꽃과 케이크를 넣어두고 가는 경우죠. 그런데 대부분 꽃과 케이크는 아무도 찾아가지 않은 채 썩고 시들어 버려요. 보기 좋게 차인 남자들이 괜히 저를 발로 차기도 하죠. 야근하는 애인을 위해 음식을 넣어놓고 가는 연인들도 제법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지하철 보관함에서 피가 흘러나온다”며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이 보관함을 열자 김장김치를 담아놓은 비닐봉지가 터져 있었던 적도 있었죠. 아예 음식물쓰레기를 저에게 맡기고 사라지는 몰상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아요.



 역별로 저에게 맡기는 물건들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죠. 강변·연신·불광역 등 버스 터미널이 있거나 인근에 군 부대가 있는 지하철역 무인 보관함에서는 휴대전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수거됩니다. 휴가 나온 군인들이 부대로 복귀하면서 휴대전화만 넣고 들어가기 때문이죠. 지하철 2호선 강남역의 경우 토익·토플 교재와 각종 공무원·자격증 시험 관련 교재들이 꾸준하게 나와요.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는 정말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동전 투입식 장치였던 저도 휴대전화로 결제가 가능해졌을 정도로 기술도 발달했죠. 그러나 제가 바라본 한국 사회는 빈곤과 결핍의 눈물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사기 피해를 입은 노인들이, 가난한 엄마들이, 삶에 지친 중년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저를 찾아오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봅니다.



글=채승기·유명한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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