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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결국은 신뢰의 문제다

중앙일보 2015.03.02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 5월 각 신문 1면 하단에 흥미로운 광고가 실렸다. 농림수산식품부와 보건복지가족부 명의의 광고였다. 푸른 바탕에 흰 글씨로 “미국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와 미국 사람이 먹는 쇠고기는 똑같습니다”라는 문구를 대문짝만 하게 적었고, 하단에 국민의 건강을 “정부가 책임지고 확실히 지키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러자 일부 시민이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으로 모금한 비용으로 정부의 광고를 패러디한 같은 크기의 반대 광고를 실었다. 이번에는 주황색 바탕에 흰 글씨로 “미국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와 미국 사람이 먹는 쇠고기는 다릅니다”라는 문구를 올렸고, “국민의 건강은 정부가 책임지고 확실히 재협상하십시오”라고 요구했다. 국가의 ‘신뢰’가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거의 100일 가까이 이명박 정부를 무력화시켰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논란의 초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느꼈던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분명히 과장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정부가 책임지고 국민 건강을 지키겠다고 하는데도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싫고 또 미국도 싫다는 이념적·정파적 태도 때문인 이들도 있었겠지만 ‘값싸고 맛있는 쇠고기를 배불리 먹으면 좋아할 줄 알았다’는 이 대통령의 생각이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가치가 이미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의 말이 경제성과 효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장되고 그릇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안전하고 건강한 삶에 대한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한평생 정치가 뭔지도 모르고 그저 농사지으며 살아 온 할머니들이 나라를 상대로 싸우는 ‘투사’가 되어 버린 밀양 송전탑 사건도 마찬가지다. 고압 송전탑이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받아들일 이들은 이젠 없을 것이다. 서울 강남 아파트 한복판으로 고압 송전탑을 건설한다고 한다면 그 지역 주민들은 가만히 있었을까.



건강과 안전이 불안해진 할머니들은 농사마저 팽개치고 송전탑 건설 현장으로 몰려들었다. 한전은 할머니들이 ‘불순한’ 환경운동가들의 사주를 받았거나 무식한 탓, 아니라면 보다 많은 경제적 보상을 원하는 행위로 간주했을 것이다. 결국 정부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이 아니라 물리적 강제력과 경제적 보상으로 반발을 해결하고자 했고, 지역 주민들은 희생자에 대한 아픈 기억과 큰 절망을 가슴에 지닌 채 살아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정부 사업에 대한 주민의 반발은 이제는 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처가 여전히 구태의연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여전히 경제성과 효율을 강조하지만 시민들이 더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건강하고 안전한 삶이다. 더욱이 과거와 달리 정보화로 인해 국가가 정책과 관련한 정보와 지식을 독점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정부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와 자료 제공을 통해 지역 주민을 안심시키고 동의를 얻어내려는 치밀한 노력과 성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돈 몇 푼 쥐여주거나 경찰력으로 억눌러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지난주 오랜 논란 끝에 원자력 발전소 월성 1호기의 재가동이 결정되었다. 설계 수명이 다했다는 원전을, 중고차 부품 교환해서 쓰듯이 수리해서 재가동하겠다는 것은 누구나 들어도 찜찜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설계 수명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설계 수명의 시한이 도래하기 전에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수명을 다한 원전을 재가동하도록 하는 결정은 엄격한 과학적·기술적 판단에 의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 표결로 처리했다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내게는 마치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 과학자들이 모여 7 대 2의 표결로 옳은 것으로 결정한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번 원전 재가동 결정은 과학이나 기술의 문제 이전에 정치의 문제다. 지역 주민과 국민의 공감과 신뢰를 얻어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는 말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의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수명이 다했다는 원전을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일이 선행돼야 했다.



하지만 재가동 결정 회의에 참여했던 위원들끼리도 충분한 공감대가 만들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과연 지역 주민들이나 일반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낼 수 있을까.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고 밀어붙이는 일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시간이 더 걸리고 설사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국민에게 주는 것이 보다 중요해 보인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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