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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규의 한국미술명작선] ⑪ 겸재 정선과 막상막하, 장시흥

중앙일보 2015.02.26 05:00
장시흥, 노량진도, 지본담채, 21.5×17㎝, 고려대박물관 소장.


조선후기를 연 18세기의 미술계는 새로운 바람이 크게 분 시대였습니다. 겸재 정선이 기존의 산수화와는 다른 진경산수화를 선보여 유행한 것도 새 바람의 하나입니다. 거기에는 남종화의 유행도 들어갑니다.



이 시대에 이런 바람이 일게 된 이유로는 여럿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무엇보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그림 수요의 증가라는 새로운 현상이 들어있습니다. 이른바 그림의 감상과 소유가 일반화되는 현상입니다. 이는 다분히 이 시대에 보여준 경제 발전과 영향이 깊습니다. 17세기 초반 조선은 상상하지도 못하던 국가적 굴욕을 당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에서 깔보았던 야만족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나중에 청이 됩니다)에 조선이 항복하고만 것입니다.



1737년 음력 1월30일 국왕이 엄동설한에 한강변에 나아가 깔아놓은 거적 위에서 무릎을 꿇고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숙였습니다. 국왕이 감당해야했던 치욕은 말할 것도 없이 신하들도 백성들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중국에 버금가는 군자의 나라를 자칭하던 조선의 자긍심이 하루아침에 깡그리 내팽개쳐지는 손상을 당한 것입니다.



이후 국왕들은 전란의 복구 작업과 함께 절치부심의 복수를 위한 부국강병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농지개간, 대동법 시행 등 개혁적인 시책들이 연이어 실시되면서 18세기에 들면 전에 없던 경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물론 이때가 되면 청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대중국관(對中國觀)도 조금씩 변하게 됩니다. 실학파의 등장은 사실 이런 중국관의 변화에 연유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어느 곳에서도 그렇듯이 저절로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제까지 상류 계층, 즉 궁중을 중심으로 한 왕족과 일부 사대부 계층에 국한됐던 서화 감상의 문화가 저변으로 확산 된 것입니다. 겸재는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초입에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진경산수화를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겸재 그림에 대한 일반의 관심과 인기가 높자 자연히 추종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겸재의 그림 스타일을 따라 그린 사람들은 문인 화가에서 도화서의 화원화가 그리고 이 무렵 민간의 그림수요를 배경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직업 화가들까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 장시흥은 낙관을 가려놓고 보면 겸재 그림이라고 착각할 만큼 겸재와 꼭 같은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노량진도’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겸재는 금강산 이외에 영남을 비롯한 한강 일대의 명승도 많이 그렸습니다. 특히 한강 일대를 그린 그림은 먹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녹색과 청색 안료를 아낌없이 사용해 화사하게 그린 것도 있습니다. 한강 일대의 몇몇 곳은 조선 초기에 계회도가 그려지던 시절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런 명소를 그린 만큼 겸재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습니다.



장시흥의 ‘노량진도’는 이런 겸재의 한강명소 그림을 본떠 그린 것입니다. 장소는 제목대로 노량진입니다. 겸재 그림의 특징은 어떤 장소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정확하게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장시흥도 그것을 따라했습니다. 당시 노량진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사육신 묘소와 사당이 떠오르는 곳입니다.



참고그림, 정선, 선유봉(仙遊峯), 『양천팔경첩』 중, 1742년, 견본채색, 33.3×24.7㎝, 개인 소장.


장시흥은 한강 백사장 건너편에서 노랑진을 바라보며 산기슭에 있는 사육신 사당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관악산 봉우리가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백사장에는 거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겸재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그림 속에 작은 인물들을 그려 넣어 자세하게 찾아보는 재미를 주는 데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그 기법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겸재가 그린 나귀는 귀가 길고 발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는 특징이 있는데 이 역시 그대로입니다.



그림 위쪽에 낙관을 쓰면서 특이하게 왼쪽부터 ‘노량진 방호자(露粱津 方壺子)’라고 썼습니다. 방호자는 그의 호입니다. 이 그림은 어떤 연작을 염두에 두고 그린 듯합니다. 현재 이 그림은 동작진과 창의문을 그린 그림과 함께 3점이 나란히 한 액자에 표구돼있습니다.





장시흥(張始興ㆍ1714년∼89년 이후)

조선후기의 도화서 화원화가. 자는 성숙(聖淑)이며 호는 방호자(方壺子)입니다. 개인적인 기록은 거의 없는 편입니다. 도화서 화원으로서의 활동은 44살 때인 1757년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가 죽었을 때 장례에 관련된 국장도감에 차출된 것을 계기로 시작해 1789년 76살 때 정조의 부친 장조의 이장을 위해 설치된 도감(都監) 때까지 계속 활동했습니다. 이와 같은 궁중 화사(畵事) 활동에 비해 감상용으로 그린 그림은 매우 적습니다. 하지만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정조 시대에는 규장각 직속으로 국왕의 명에 따른 그림을 그리는 자비대령 화원으로 봉직했습니다.





글=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 ygado2@naver.com

한국미술정보개발원(koreanart21.com) 대표. 중앙일보 미술전문기자로 일하다 일본 가쿠슈인(學習院) 대학 박사과정에서 회화사를 전공했다. 서울옥션 대표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저서 『옛 그림이 쉬워지는 미술책』, 역서 『완역-청조문화동전의 연구: 추사 김정희 연구』 『이탈리아, 그랜드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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