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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영어메뉴판 바꾼 대학생들

중앙일보 2015.02.26 00:31 종합 14면 지면보기
경희대 학생들이 지난해 10월 엉터리 한식 표기를 바로잡기 위해 온라인 한식사전을 만들어 외국인 학생들(가운데 두 명)에게 홍보하고 있다. [사진 경희대]


“제육볶음이 ‘stir(섞다) the sixth’, 수정과는 ‘modifications(수정) and’?”

[이젠 시민이다] 시민교육 실천한 경희대생들
91가지 메뉴 정보 영문으로 번역
쉽고 제대로 된 한식사전 만들어
"참여하고 실천할 때 세상 바뀌죠"



 경희대 영어학부 1학년 정채린(20·여)씨는 지난해 8월 외국인 친구와 서울 명동의 한식당에 갔다가 황당한 경험을 했다. 음식을 고르던 친구가 “이게 뭔 음식이냐”며 투덜대기에 메뉴판을 봤더니 한식 메뉴를 영어로 옮긴 표기가 이렇게 돼 있었던 것. 메뉴판에 적힌 ‘제육볶음’의 ‘제육’은 ‘제6’으로, ‘수정과’는 ‘고친다’는 뜻의 ‘수정(修正)’으로 표시돼 있었다. 식당 주인은 “구글 번역을 그대로 옮겨놨다”고 했다. 정씨는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대표적인 한식당인데 영문 설명이 엉터리여서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2학기 개강 후 정씨는 ‘시민교육’ 수업을 함께 듣는 조원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정부가 ‘한식 세계화’까지 추진했는데 ‘제6’이 말이 되냐. 우리가 직접 바꿔 보자.”



 국문과 1학년 문수빈(20·여)씨의 제안에 정씨 등 다른 4명의 조원들이 흔쾌히 동의했다. 이들은 먼저 외국인이 밀집한 명동·이태원 등지의 한식집을 돌아다니며 인기 메뉴 91가지를 선정했다. 이를 다시 밥·찌개·국·후식 등 7가지로 분류하고 음식 이름을 발음과 의미 두 가지 방식으로 표기했다.



  정확한 설명을 위해 조리 전문가, 영문과 교수 등의 조언을 받아 두 달 동안 ‘사전’을 만들었다. 12월 초엔 이 같은 91개 음식의 정보가 담긴 ‘한식사전 블로그(blog.naver.com/skybridge14)’의 문을 열었다. 구글에도 잘못된 번역을 시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지나칠 뻔했던 경험이 사회적 실천으로 옮겨진 건 경희대가 시행하고 있는 ‘시민교육’ 수업 덕분이었다. 2011년부터 시작된 ‘시민교육’은 3학점짜리 교양필수 과목이다. 한 학기의 절반은 ‘제2의 탄생’이란 이름의 이론 교재로 진행한다. 시민의 권리와 책임, 민주주의의 원리와 문제 등을 배운다. 수업은 조별 발표와 토론식이다.



 나머지 절반은 본인이 생각했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직접 사회에 참여해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보고서를 제출한다. 매년 5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해 1000여 가지의 사회 활동을 벌인다.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김윤철 교수는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는 협업의 과정을 통해 시민의식이 길러진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이찬기(20·경희대 물리학과1)씨 등은 국산 과자의 과대포장 문제를 지적하며 사회 이슈를 만들어냈다. 환경부와 국회를 찾아 법 개정을 건의하고 학교 안팎과 웹 공간에서 과대포장 실태를 고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2013년에는 또 다른 학생들이 생맥주의 표기된 용량과 실제 용량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 서울시로부터 개선책을 이끌어냈 다. 이씨는 “시민교육 수업을 통해 처음으로 사회의 주인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며 “우리가 직접 참여하고 실천할 때 세상이 바뀐다”고 말했다.



윤석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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