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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태극기를 꼭 걸어야 하나

중앙일보 2015.02.26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국기를 신고 다니고, 깔고 앉고, 등으로 뭉개고, 덮고 자고, 찻잔 받침으로 쓴다. 영국인들 이야기다. 유니언기(영국 국기의 공식 명칭)를 잘라 덮은 듯 디자인한 운동화는 흔하고 바닥에 그 모양을 새긴 하이힐도 있다. 국기로 포장한 형태의 소파·이불·쿠션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유니언기 머그잔·테이블보·스마트폰 보호 케이스도 런던 시내의 기념품점 진열장에 널려 있다. 지붕 또는 차체 전체를 유니언기 무늬로 도색한 택시나 승용차도 있다. 대문을 아예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집도 봤다. 이 중에서 쿠션·자동차 지붕·이불은 한국에도 이미 ‘도입’됐다.



 양말, 바닥에 까는 러그, 애완견 집에 이르면 불경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정작 그 나라에서 그런 게 문제가 됐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다양하고 친숙하게 국기를 즐긴다.



 한국의 행정자치부가 3·1절을 앞두고 태극기 달기 캠페인을 열심히 진행 중이다. 민간 건물에까지 국기 게양을 의무화하려 했으나 ‘법으로 강제할 일은 아니다’는 다른 부처의 반대로 무산됐다. 오늘(26일) 오후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대대적인 가두 행사도 열린다.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 나부터 실천하자!’가 공식 구호다. 국기 게양이 1988년식 국민운동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의 국기하강식 장면에 감명받은 공무원이 많은 것 같다.



 우리의 국기는 높은 곳에 걸어 두고 경건하게 우러러봐야 하는 대상이다. 대전의 한 고등학교에는 높이 35m의 국기봉이 있는데, 국내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것이 학교의 자랑 중 하나다. 이 학교에 가보면 멀리서는 태극기가 보이지만 정작 운동장에서는 고개를 하늘로 젖히지 않으면 보기가 힘들다.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이라는 대통령령이 있다. 태극기를 차에 달 수 있는 경우와 태극기 둘레를 금색 실로 장식할 때의 규격까지 제시하고 있다. 훼손된 국기를 소각하지 않고 그냥 버리는 것도 위법이다. 이런 엄격함 때문인지 우리 국민들이 나름 창의적으로 국기에 애정을 표현하는 것은 월드컵 경기 응원 때뿐이다.



 아버지에게 필요한 덕목이 근엄함에서 자상함으로 바뀐 지 꽤 됐다. 태극기도 높은 곳에서 우리 주변으로 내려올 때가 됐다. 박인비 선수는 국가 대항전이 아닌 시합에도 태극기가 새겨진 골프백을 쓴다. 태극 문양의 볼 마커도 사용한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이는’ 태극기보다 일상생활에 ‘창조적’으로 스며든 태극기가 더 반갑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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