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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설날에 생각해보는 지구촌의 운명

중앙일보 2015.02.16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민족의 명절 설을 맞으면 기다리는 가족들과의 반가운 해후를 생각하며 고향 길을 서두르거나 아니면 마음의 고향이라도 되찾아 떠나보게 된다. 우리만의 설은 오랜 시간 맺어온 이웃들과의 인연을 기억하며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생각하는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올 을미년 설에는 우리 민족이 겪어온 역사의 의의를 되새겨보게 된다. 70년 전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된 흥분 속에서 우리는 큰 불운과 행운에 동시에 부딪치게 된다. 강대국 간 밀약의 전횡으로 한반도가 북위 38도선으로 양분되며 비롯된 국토와 민족의 분단은 분명 우리 민족 최대의 불운이며 재앙이었다.

 한편 바로 그해 1945년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유엔이 창설된 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큰 행운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동서냉전의 대결은 시작되었고 공산진영의 붉은 세력이 아시아 대륙을 뒤덮어가는 가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가.

다행히도 47년 유엔 총회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한국인들 스스로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48년 5월 10일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엔 감시하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 헌법 제정, 대한민국 정부 출범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유엔이 대한민국 출범에 산파역을 담당했던 것이다. 또한 50년 북한이 6·25 남침을 강행했을 때도 유엔은 큰 희생을 감수하며 대한민국 수호에 앞장서 유엔의 권위와 자유를 존중하는 국제질서를 지키겠다는 보편적 결의를 보여 주었다.
 
 53년 휴전 이후, 지난 60여 년 우리는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정치의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립과 독선을 피하고 국제사회의 주류에 과감히 합류함으로써 가능했던 업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의 한 세대에 걸친 권위주의 시기에도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고립을 피하고 개방을 촉진하며 지구촌의 선진화 물결에 합류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외면하지 않았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87년의 민주화, 88년의 서울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인은, 특히 젊은이들은 왕년의 고질적인 고립주의, 패배의식, 열등감을 털어버렸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적개발원조(ODA) 규모가 2조4000억원대라는 것이 그러한 국민의 개방적 국제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25년 전 186억원의 예산으로 출발한 무상원조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올해 예산은 6500억원으로 35배 늘었고 해외로 보내는 봉사자 수는 연간 4500명에 이르고 있다. 미국평화봉사단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그런데 이렇듯 지구촌 공동발전에 보조를 맞추어오던 정부나 국민의 적극성이 최근 들어 다소 주춤거리는 징조를 보이고 있다. 경제불황에 따른 저소득층의 고통과 중산층의 실의, 세월호 침몰에 이은 대형 안전사고, 정부와 정치권의 혼선과 혼란 등을 감안하면 지금이 과연 남의 나라 형편이나 지구촌을 걱정할 때인가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작금의 우리 실상이다. 그러나 지난 70년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이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을 수없이 넘어왔다. 그래도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위치와 체면을 유지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국제사회와의 연결고리를 끝내 지켜왔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출범과 안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유엔 중심의 지구촌 공동작업에는 계속 앞줄에 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유엔이 21세기로 들어오며 출발시킨 ‘새천년개발목표(MDG)’ 사업이 올해로 마감된다. 전 세계적으로 하루 1달러25센트로 연명하는 절대빈곤가구, 깨끗한 식수를 못 마시는 인구, 5세 이하 유아사망률, 산모사망률 등을 14년 동안에 반(半)으로 감소시킨 ‘새천년개발목표’의 성과는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 노력에 앞으로 15년, 즉 2016~2030년 사이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박차를 가할 것인가. ‘2030년에 이르는 인간존엄성의 행로(行路)’라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지난 연말보고는 빈곤퇴치를 위한 경제발전, 공평한 사회건설, 지구의 자연환경 보호를 삼위일체로 추진하겠다는 청사진이었다.

 지난 70년간 우리 한국이 자타가 공인하는 발전의 모범국이 될 수 있었다면, 70회 생일을 맞게 된 유엔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지구촌 공동노력에 보다 열성적으로 동참해야 하겠다. 그것에는 지구촌의 운명뿐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의 운명도 함께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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