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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의 시시각각] 김장수의 애국, 조명균의 애국

중앙일보 2015.02.16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박승희
정치부장
선명한 체험은 뇌리에 스틸사진을 남긴다. 시간이 흘러도 스틸사진은 앞 장면과 뒤 장면을 연결하는 실마리가 돼 기억세포를 고스란히 재생해 낸다. 그래서 스틸사진이 때론 동영상보다 더 강렬하다.



 2월 6일 서울중앙지법에선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혐의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18개월 만의 무죄선고였다. 이완구 논란에 묻혀 언론엔 단신으로 실렸다. 피의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조명균 전 청와대 안보정책비서관. 기억 속에서 7년여 전 스틸사진이 재생되고 있었다. 수곡휴게소의 두 사람이었다.



 2007년 10월 4일. 2차 남북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달리던 방북단 버스는 사리원 근처 수곡휴게소에 멈췄다. 공동취재단의 일원이던 나는 화장실에서 ‘뜻밖의’ 인사를 만났다. 김장수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다. 우리가 평양에 있는 동안 그는 서울에서 영웅이 돼 있었다. 김정일과 인사할 때 장관들 중 유일하게 허리를 굽히지 않은 그에게 언론은 ‘꼿꼿장수’란 애칭을 붙여 줬다.



 -서울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허허 . 새삼스러운 게 아닌데…. 군인은 원래 악수할 때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휴게소에서 또 한 명을 만났다. 조명균 비서관이었다. 그는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노무현·김정일 회담에 배석한 그에게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 그 가방에 대화록이 들었습니까.



 “(웃으며)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할 수 없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당시 조 비서관은 대한민국에서 북한을 가장 잘 아는 공무원 중 한 명이었다. 1984년 노태우 정부 때 통일원 조사연구실에서 시작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북한 업무만 했다. 김영삼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에서도 근무했다. 공식·비공식으로 평양을 방문한 게 50여 차례가 넘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통일부 개성공단사업지원단장으로 일하던 조 비서관을 2006년 청와대로 불러들였 다.



 그러나 수곡휴게소에서의 만남 뒤 1년도 안 돼 둘의 운명은 하늘과 땅처럼 갈렸다. 김 장관은 이명박 정부로 바뀐 다음에도 ‘꼿꼿장수’의 위력으로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을 거쳐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인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조 비서관은 ‘노무현 청와대에서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무보직으로 과천 중앙공무원교육원에 있다가 2008년 10월 스스로 공직을 떠났다. 이후 소문에 그가 신앙생활에 심취했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세상은 그런 그조차 가만두지 않았다. 보수·진보 간 진영 싸움은 남북 정상회담 발언록을 끄집어냈고, 조 전 비서관은 피의자로 기소됐다. 긴 법리 공방 속에 2015년에야 받아 든 무죄판결은 그와 가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공무원윤리헌장 실천강령의 첫째는 ‘애국’이다. 행시(23회) 합격 후 국세청에서 일하다 84년에 통일원으로 옮긴 조 전 비서관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었다. 노 전 대통령과 별 인연도 없었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도 애국이란 강령으로 일했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애국이란 강령으로 일했다. 적어도 내가 겪고 관찰한 김장수의 애국과 조명균의 애국은 두 사람의 운명이 선명하게 갈려야 할 만큼 다른 색깔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2007년 10월을 기억하는 나는 그걸 제대로 못 알려서 부끄럽다. 보수에서 진보로, 진보에서 보수로 정부가 바뀌는 동안 정치가 희생양으로 삼은 제2, 제3의 ‘조명균’은 많다. 대한민국의 위기 중 하나는 이처럼 정치가 오염시킨 공직사회의 그늘이 점점 짙어 간다는 거다.



 대통령이 바뀌면 구속될지도 모르는데 대상도 흐릿한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죽어라 일할 보통 공무원은 없다. 미국의 공무원들은 민주당 정부에서도, 공화당 정부에서도 변함없이 나라에 봉사하고 승진하고 대접받는다. 자리 바꿈 하는 건 장관과 차관 등 정무직일 뿐이다. 공무원을 집권세력의 부역자로 내모는 정치는 근시(近視) 정치다. 5년마다 공무원을 새로 뽑을 순 없지 않은가.



박승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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