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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드는 건 주얼리 아닌 문화”

중앙선데이 2015.02.14 01:33 414호 9면 지면보기
하이 주얼리 이벤트 ‘볼 드 레전드’
명품 브랜드 회사에서 최고 경영자와 디자인 수장이란 동전의 양면이다. 한 배를 탄 운명이지만 성향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전자는 모든 것을 숫자로 입증해야 하고, 후자는 영감·창조성·새로움에 목숨을 건다. 상업성이 먼저냐, 예술성이 먼저냐의 논란 역시 그 둘의 균형이 깨졌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클리셰다.

반클리프 아펠 CEO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보스

그런데 이 상반된 두 역할을 혼자 해내는 사람이 있다. 럭셔리 보석·시계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의 CEO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니콜라 보스(Nicolas Bos)다. 2009년 이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부사장(Vice President)을 겸임한 그는 이듬해 미국 지사장 겸 컬렉션 개발·마케팅·PR·리테일 개발 부문까지 총괄한다. 그리고 2013년 브랜드의 CEO 자리에 올라 ‘만들고 파는’ 모든 것을 양 어깨에 짊어지게 된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서로 다른 일의 균형을 맞추는 리더십이란 무엇일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중앙SUNDAY S매거진이 6일 그를 만났다. 반클리프 아펠의 새 하이 주얼리 컬렉션 ‘볼 드 레전드(Bals de Légende·전설의 무도회)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5~6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볼 드 레전드’ 컬렉션을 직접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렸다. 브랜드 측이 국내 VIP와 유명인사를 위해 마련한 행사에는 모두 90여 점이 등장했다. 보통 수십억 대 가격으로 국내에서 따로 보려면 보증금을 내야하는 고가의 제품들이었다. 그 중에는 브랜드의 대표 작품인 지프 넥클리스, 요정 모티브의 미스터리 세팅 작품들은 물론 100억 원대의 29.99 캐럿의 카슈미르산 사파이어 반지가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이 주얼리는 1880년 해발 고도가 4800m가 넘는 지역에서 발견돼 희소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라는 게 브랜드 측의 설명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컬렉션 프리뷰와 함께 갈라 디너, 모델쇼도 펼쳐졌다. 20세기 무도회를 재현하듯, 8명의 모델들이 우아한 이브닝 드레스 위에 장착한 화려한 보석을 뽐냈다. 이를 위해 파리지앵의 컨템포러리한 디자인을 선보이기로 유명한 프랑스 디자이너 가스파드 유케비치가 의상을 맡았고, 파리와 런던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셰프 헬렌 다로즈가 특별 메뉴를 마련했다.
반클리프 아펠의 컬렉션은 일단 스케일이 크고 방대하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20세기 무도회가 모티브다. 당대 가장 경이로웠던 5대 무도회의 이브닝 파티에서 영감을 얻었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마지막으로 열었다는 ‘겨울 궁전 무도회(1903)’를 시작으로, 세계적 아트 컬렉터였던 돈 카를로스 드 비스테기가 베니스 영화제에 맞춰 열어 화제가 된 ‘세기의 무도회(1951)’, 아트 컬렉터 알렉시스 드 레데가 파리의 한 호텔에서 천일야화를 주제로 열었던 ‘오리엔탈 무도회(1969)’, 여기에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트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사교계 명사들을 초대해 꾸민 ‘블랙 앤 화이트 무도회(1966)’,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마르셸 프루스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파리에서 마련됐던 ‘프루스트 무도회(1971)’까지 아우른다. 이처럼 시기와 장소가 저마다인 테마를 풀어내자면 아이디어와 스토리텔링의 근간이 그만큼 깊고 넓어질 터. 이를 이끌고 있는 니콜라 보스는 럭셔리 MBA 스쿨인 ESSEC을 졸업한 경영학도다.

컬렉션 하나가 문학·역사·예술의 복합체다.
“제작에 참여하는 팀 자체가 제품이 아닌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자는데 이미 합의가 돼 있다. 세계 곳곳에 숨겨진 전설과 상징 그리고 전통을 발견하고 우리만의 방법으로 재해석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카이브에서 모티브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린다. 일상에서 접하는 문학이나 무용, 음악 등에 끊임없이 궁금증을 갖고 이를 브랜드의 아카이브와 조화시킨다. 그 자체가 흥미로운 작업이다.”

이번 컬렉션을 예로 든다면.
“어느날 우연히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됐다. 1971년 ‘프루스트 무도회’에 참가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한 컷이었다. 피사체는 모호했다. 현재인지 과거인지, 슬픈 건지 행복한지 알 수 없는 묘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이 사진을 보석세공인·보석학자·디자이너들이 모인 팀과 공유하며 컬렉션으로 발전시켰다. 팀원들은 역사학자들과 함께 일하며 당시 20세기를 장식했던 황홀한 무도회들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시 손님이 누구였는지, 의상이나 분위기는 어땠는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파고드는 것이다. 이후 각자가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컬렉션에 기여했다. 가령 스톤 전문가가 19세기 로맨틱 스톤을 발견했다면 그는 이것이 얼마나 기술적 세공이 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고, 여기에 맞춰 방법을 제시하게 된다.”

이런 과정은 얼마나 걸리나.
“보통 3년 정도의 시간을 거쳐야 한 컬렉션이 탄생한다.”
그가 언급한 프루스트 무도회 하나만 해도 스토리가 풍부하다.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알려진 구이 드 로드차일드 남작 부인이 마련한 이 행사에는 800명의 손님이 초대된다. 그리고 귀빈들은 무도회를 위해 7권짜리 장편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다. 작품 속 2000여 명의 캐릭터에서 영감을 받아 옷을 입어야했기 때문이다. 무도회에선 독특한 의상과 진귀한 보석의 향연이 펼쳐지고, 초상 사진의 거장 세실 버튼이 한 명 한 명의 손님들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반클리프 아펠은 이를 바탕으로 ‘로즈몽드 클립’을 제작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붉은 장미처럼 볼이 빨간 어린 숙녀로 묘사됐던 로즈몽드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는 더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지마 롱 넥클리스’의 ‘지마’는 ‘겨울 궁전 무도회(1903)’ 모티브 중 하나다. 지마는 겨울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로, 눈 내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지칭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박학다식해야 할 것 같다.
“어느 하나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사진·비주얼 아트·문학 등 여러 분야에 항상 촉을 세우고 있다. 요즘은 모든 것이 복합적이지 않나. 18세기 이전 문학을 읽으면서 유머책도 멀리하지 않는다. 오페라를 보다가 어느 날은 블록버스터를 즐긴다.”

하지만 CEO로서의 역할도 막중하지 않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의 균형은 어떻게 유지하나.
“반클리프 아펠은 가장 예술적인 보석과 시계를 만드는 ‘진정한 창조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비즈니스적인 현실감을 잃지 않는 아주 환상적인 메종이다. 즉 비즈니스가 있어야만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 길을 갈 수 있고, 비전과 장인정신을 창조하고 전승해 나간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뻔한 대답으로 들릴 거라 짐작한 것일까. 그는 이쯤에서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설명을 이어갔다. “보석을 만들어 수익을 낸다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교(그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주얼리 전문 수업을 하는 ‘에꼴’을 세웠다)를 만들어 기술을 전승할 수 있고, 우리의 하이 주얼리를 보고 ‘나도 보석 디자이너 혹은 보석 전문가가 되겠다’고 마음먹는 젊은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또 도저히 살 수 없는 가격이지만 환상적인 보석 작품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후대에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는 예술성과 상업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 마디 보탰다. 건축을 예로 들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 디자인도 실제 누가 돈을 내고 짓지 않으면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듯, 보석 역시 누군가 실제 구매하고 착용하는 순간 존재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 구찌오 구찌(1881~1953)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떴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을 안다. 후대가 계속 뭔가를 만들어 팔고, 또 우리가 그걸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예술을 내팽개치면 대량 제품이 되고, 예술만 추구하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운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답변을 정리했다.

예술성을 강조하지만 동시대성을 무시할 순 없다.
“패션이라면 늘 새로운 것, 다른 것, 깜짝 놀랠 무언가를 중시할 것이다. 하지만 보석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오늘 구입해서 내년에 착용을 한다 해도 결코 멋스러움에 손색이 없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각각의 보석들이 가지는 의미나 이야기들의 ‘연관성’을 일관성 있게 일궈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소스가 바로 나비다. 나비는 옷·장신구·가구 그 어디서도 쉽게 문양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뿐 아니라 과거 일본의 기모노 혹은 유럽 왕실에서도 쓰였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아이폰을 들며) 이 전화기가 15년 뒤 무슨 영감을 줄 수 있을까.”

그가 말하는 ‘연관성’은 이번 컬렉션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41년 첫 출시된 발레리나 클립은 반클리프 아펠의 예술적 유산을 이어가는 작품 중 하나다. 이번엔 5대 무도회의 모티브에 맞춰 5개의 클립이 새로 제작됐다. ‘세기의 무도회(1951)’와 짝지은 클립은 밝고 역동적인 도시의 느낌을 살려 부채를 들고 있는 발레리나를, ‘블랙 앤 화이트 무도회(1966)’에서 영감을 얻은 클립은 무도회의 드레스 코드 그대로를 되살려 다이아몬드와 블랙 오닉스로 장식하는 식이다.

당신이 가장 아끼는 컬렉션은 무엇인가.
“너무 힘든 질문이다. 고르기가 어렵지만 단 한 개를 꼽아야 한다면 메종을 대표하는 지프 넥클리스(zip necklace)다. 여성스러운 스타일과 독보적인 기술력의 결합으로 창조된 제품은 아직까지도 디자인으로나 기술력으로나 메종의 예술품과도 같다.”

아름다운 보석을 볼 때 여자라면 더 좋았겠다 싶은 적은 없나.
“(크게 웃으며) 당연하다. 실제 착용하고 싶은 보석을 디자인하면 직접적 연관이 클 것 같다. 실제 컬렉션이 완성되면 항상 팀과 함께 보곤 하는데 성별로 갈린다. 여성들의 경우 아름답다는 환호성부터 나온다. 남자들은 좀 더 기술적인 부분이 잘 됐는지를 본다. 나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아름다움보다 제품을 들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예술성이 포괄되었는지, 실현하고자 했던 기술력이 제품이랑 잘 맞는지를 먼저 보게 된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개인적인 감정이나 주관으로 컬렉션으로 보지 않아 남자라도 괜찮은 것 같다. 뭐 언젠가 직접 착용해 볼 수도 있고.하하.”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반클리프 아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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