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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게 없는 내 핸드백 필요한 물건은 꼭꼭 숨더라

중앙선데이 2015.02.14 03:13 414호 34면 지면보기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서 가져온 가방 뉴스를 보다가 회사 책상 옆에 놓인 내 핸드백에 눈길이 갔다. 암스트롱은 생전 누구에게도 가방 속 물건에 대해 언급한 적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가방 속 사정이 나랑 비슷해서였을까라는 얼토당토 안한 상상을 해본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핸드백 안 세상

내 핸드백은 생전뿐 아니라 사후에도 절대 열어 보여줄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그건 내가 길에서 절대로 쓰러져 죽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내 핸드백 안을 다른 사람이 보게 되는 순간, 나는 죽어서도 저 세상에서 낯을 붉히고 있을 테니.

가방 안의 세계는 한마디로 판타스틱하게 미스터리한 세상이다. 짝 잃은 귀걸이, 꼬일 대로 꼬인 이어폰, 뚜껑은 반드시 날아가 있는 립스틱과 아이펜슬, 아무리 호호 불어도 안 나오던 볼펜이 가방 바닥에 그려놓은 잉크 얼룩.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의 명함, 먹은 적도 없는 듯한 식당과 커피집 영수증. 지갑에 넣은 게 분명한데 바닥에 그득한 동전과 꼬깃꼬깃 접혀진 지폐들, 엊그제 산 듯한데 쭈글쭈글 주름 사이에 때가 끼어 납작해진 휴대용 물휴지와 껌. 무엇이 들었는지 불룩해진 배로 제대로 잠기지 않는 지갑은 열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기에 더 이상 열고 싶지 않다. 신기한 건 이렇게 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꼭 필요할 때는 아무리 뒤져도 절대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마 핸드백 속에는 영화 ‘토이스토리’같은 세계가 펼쳐지는 게 아닐까. 내가 가방을 닫는 순간 가방 속 물건들이 살아나서 저희끼리 운동회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도망도 가는. 립스틱과 아이펜슬은 “모자 벗고 싸우자”며 머리를 서로 부딪히다 저렇게 상처를 달고 사는 싸움꾼이며, 볼펜은 한 대 맞고 매일 검은 눈물을 흘려 대는 울보고,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가방으로 도망가다가 귀걸이 한 짝은 탈출에 성공하고 굼뜬 다른 한 짝은 남아 있는….

아니다. 가방 속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블랙홀이 존재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미스터리한 세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비행기표와 필요할 땐 나오지 않던 동전, 긴 머리일 땐 사도 사도 가방 안에서 보지 못했던 머리핀과 고무줄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불쑥불쑥 튀어나올 리가 없다. 산지 며칠 만에 화석처럼 세월의 흔적을 담은 몰골로 변해버리는 물휴지와 껌종이들만 봐도 분명 시간의 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그 블랙홀의 정체가 나중에 발견한 핸드백 안감의 구멍이었다는 걸 발견하곤 허탈하기도 했지만.

그 정신없는 핸드백을 들고 정류장에 줄서 있는 나. 가방 안에서 교통카드 지갑을 꺼내다 땅바닥에 남들 보기 민망한 물건이 떨어져 화끈거렸던 기억도 여러 번이지만, 정리에 장애가 있는 나로선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또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내 가방을 들고가면 차곡차곡 정리해주는 가방 정리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방 속 물건을 차곡차곡 정리해주는 건 물론 그 물건들을 보면서 “아 당신 참 꼼꼼하고 열심히 살아왔군요.

아침엔 바빠서 맨얼굴로 출근하지만 퇴근 후 만나는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화장으로 예의를 다하기 위해 아이펜슬을 들고다니고, 일하다 지칠 때면 힘을 내기 위해 초콜릿을 먹으며 버티고. 자주 읽지는 않지만 늘 책을 한 권 가지고 다니며 바쁜 생활 속에서도 공부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참 잘 살고 있는 거에요.” 이러면서 마음의 위안까지 주는.

혹 발명가라면 가방 안에 물건을 넣기만 하면 일렬로 자동 정리되고 밖에서 물건 목록을 확인해 필요한 물건을 누르기만 하면 튀어나오게 하는 첨단 가방을 발명할 수도 있겠다.

정리 안 된 가방을 들고다니는 일은 이렇게 잠시 즐거운 상상력을 키워주기도 하니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아 참, 요즘은 남자들도 패션 핸드백을 들고다니기 시작했더라. 그 모습 참 아름답지만 “웰컴 투더 미스터리한 핸드백 월드”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 비평 칼럼을 써왔으며 중앙SUNDAY와는 창간부터 인연을 맺어왔다. 현재 뉴스통신사 뉴스1 디지털 전략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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