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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사망 소식에 장제스 "마오의 팔 하나가 날라갔다"

중앙일보 2015.02.14 21:43
1971년 9월 13일 0시 정각, 린뱌오(林彪·임표) 부부와 아들을 태운 차량이 베이다이허(北戴河)의 여름별장을 출발했다. 경비초소에 이를 무렵 총성이 울렸다. 동승했던 비서가 차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돌덩이처럼 구르다가 정신을 잃었다. 무장 병력을 태운 차량들이 추격했지만, 린뱌오의 승용차는 중국에 두 대밖에 없는 고성능 방탄 리무진이었다.

린 탈출 보고에 마오쩌둥은 팔짱만
저우언라이가 즉시 전국 공항 봉쇄
고비사막에 린 전용기 추락한 뒤
저우언라이 "내가 격추 명령 안했다"

린뱌오 일행은 22분 후 산하이관(山海關)공항에 도착했다. 심신이 허약해진 린뱌오는 예췬(葉群·엽군)이 앞에서 끌고, 외동아들 리커(林立果·임립과)과 뒤에서 미는 바람에 겨우 전용기에 올랐다. 공항 관리자는 어리둥절했다. 상부에 의견을 물었다. “수장(首長)의 비행기를 이륙시키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지시를 바란다.” 답변이 없었다. 세 차례 계속해도 묵묵부답(默默不答)은 마찬가지였다. 0시 32분 비행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중난하이(中南海) 경호대장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은 거의 동시에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숙소로 달려갔다. 린뱌오의 돌발행동을 보고받은 마오쩌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넋 나간 사람처럼 담배만 피워댔다. 몇 달 전, 장시(江西)성 서기의 말이 떠올랐다. “린뱌오가 중국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수륙 양용기를 이용해 타이완이나 남조선으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린뱌오의 최측근인 공군 사령관 우파셴(吳法憲·오법헌)의 전화가 정적을 깼다. “전용기가 북쪽을 향한지 30분이 지났다. 장자커우(張家口)를 거쳐 허베이(河北)를 빠져 나와 네이멍구(內蒙古)로 진입했다. 격추시킬지 여부를 명령해주기 바란다.”

마오쩌둥은 잠시 침울한 표정을 짓더니 한 마디로 거절했다. “누가 뭐래도 린뱌오는 우리 당의 부주석이다. 하늘이 비를 뿌리려 하고, 신부가 결혼하기로 작정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무도 막지 못한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내버려 둬라.” 죽이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숙소를 나온 저우언라이는 팔짱만 끼고 있지 않았다. 린뱌오가 중국을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전군에 비상령을 선포했다. 전국의 비행장을 봉쇄하고, 운항을 중지시켰다. 레이다를 총동원해 하늘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용의주도한 저우언라이는 무전으로 린뱌오의 전용기를 호출했다. “돌아와라. 어느 비행장에 착륙하건 내가 직접 마중 나가겠다.” 답이 있을 리 없었다. 새벽 1시 55분, 착륙할 곳이 없어진 린뱌오의 전용기는 몽고 국경 상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새벽 2시 30분, 고비사막의 분지에서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국공전쟁 시절, 동북3성을 시발로 13개 성에서 국민당군에게 승리를 거둔 린뱌오는 온몸이 찢긴 채 숨을 거뒀다.

학생 시절 저우언라이는 연극반 활동을 했다. 연기력이 뛰어났다. 노인 역이건, 젊은 여자 역이건, 능청 맞을 정도로 다 소화했다. 배우로 나가면 대성하겠다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다. 린뱌오의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보고를 받자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우선 “오랜 세월 환난을 함께한 동지를 잃었다”며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변명도 잊지 않았다. 린뱌오의 지지자가 많았던 광저우(廣州)를 찾아가 군 지휘관들을 소집했다. “나는 린뱌오의 전용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린뱌오는 당 중앙의 부주석이고 전 군의 부지휘관이다. 나는 정치국의 일개 상임위원에 불과하다. 군에도 아무런 직함이 없다. 이런 내가 당장(黨章)에 명기된 차기 지도자가 탄 비행기를 격추시키라는 명령을 감히 내릴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린뱌오를 타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전 당과 전 군은 물론이고 전국의 인민들에게 무어라 설명을 하겠는가.”

린뱌오의 사망 소식이 퍼지자 중국 지도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애석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죽었다는 사람도 많았다. 전쟁 시절 “우리는 린뱌오의 전사(戰士)들”을 노래했던 제 4야전군 출신들은 통음으로 날을 지새웠다.

사건 닷새 후, 타이완의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옛 제자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저녁이나 같이 하자며 차남 웨이궈(蔣緯國·장위국)를 불렀다. 만찬 도중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오쩌둥의 팔 한 쪽이 날라갔다. 린뱌오가 죽었다.” 웨이궈가 기록을 남겼다. “그날 선친의 표정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입도 벙긋 못했다. 밥만 먹고 돌아왔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의 판단도 장제스와 비슷했다. 국가안전국에 “중공의 거인(巨人)이 세상을 떠났다. 마오는 불구자가 됐다. 우리는 나머지 한 쪽 팔이 잘려 나갈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린뱌오와 동향인 국민당 이론가 타오시셩(陶希聖·도희성)도 기록을 남겼다. “평소 총통은 린뱌오 얘기를 자주했다. 린뱌오는 강직한 사람이다. 마오에게 충성할 리가 없다는 말을 할 때마다 의아했다. 이유를 물으면 답하지 않았다.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자 눈물을 흘렸다.”

타오시셩은 죽는 날까지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린뱌오 사망 40년이 지나서야 이유가 밝혀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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