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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서촌·삼청동·북촌 … 달라진 경복궁 마을

중앙일보 2015.02.14 00:56 종합 12면 지면보기
경복궁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서촌·삼청동·북촌은 지난 10여 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부동산 가치의 상승은 이곳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본지는 부동산 컨설팅업체 태경파트너스에 의뢰해 2000·2005·2015년의 땅값·임대료·권리금의 추이를 제공받았다. 입지에 따라 가격 차이가 크기 때문에 각 마을의 한 지점을 임의로 정해 가격 변동을 추적했다. 전산화되기 이전인 2000년의 가격은 중개업소에서 추정한 수치를 사용했다.


한옥 덕분에 국내외 관광객 방문 급증
부동산 뛰고 땅값·임대료·권리금 껑충
주민 떠나고 정겨운 모습과 정취 퇴색

 계동길에 있는 북촌 미니스톱 인근의 경우 2000년의 땅값은 3.3㎡(1평)당 65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 2002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강북 뉴타운’ 계획을 발표하면서 땅값이 크게 뛰었다. 그해에만 강북 부동산 가격이 25%가 올랐다.



 그런 과정을 거쳐 2005년 미니스톱 인근 땅값은 평당 2500만원까지 뛰었다. 2008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한옥 선언’으로 북촌의 땅값은 다시 한번 크게 상승했다. 오 전 시장은 한옥을 통해 서울의 가치를 끌어올리려 했다. 이후 관광객의 숫자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북촌의 관광안내소를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은 2012년 8만8055명이었다. 하지만 2년 후인 2014년엔 24만8927명이 됐다. 영어권 관광객도 같은 기간 4만3652명에서 12만6682명으로 세 배 가까이 불어났다. 2015년 현재 미니스톱 인근의 땅값은 평당 7000만원을 호가한다. 15년 만에 11배가 오른 것이다.



 경복궁 마을이 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변모하면서 임대료와 권리금도 크게 뛰었다. 삼청동의 중심지인 오설록 옆 건물을 기준으로 그 변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1층 33㎡(10평) 상가의 임대료가 2005년엔 보증금 1억원에 월세 500만원이었다. 지금은 보증금이 그 두 배인 2억원이 됐고 월세는 700만원으로 올랐다. 상권의 가치를 보여 주는 권리금은 5000만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세 배가 됐다.



 서촌에서 30년 넘게 영업을 한 종로부동산 서진하 대표는 동네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37년 전 시집와 여기서 쭉 살았어요. 1988년엔 평당 180만원이면 집을 샀죠. 2000년대 초반 500만~600만원 하던 게 뉴타운 발표로 2000만원까지 오르더군요. 경복궁과 청와대를 끼고 있어 조용하고 안전한 동네가 너무 시끄러워졌어요. 물론 강남에 대한 피해 의식이 컸던 주민들에게 마을의 부흥은 좋은 소식이죠.”



 경복궁 마을의 변화는 ‘주거 공간이 상업지구로 변하면서 유동인구가 늘고 부동산 가치가 크게 높아졌다’고 요약할 수 있다. 서울시립대 정석(도시공학) 교수는 “한옥이 재평가를 받으면서 주민의 자긍심이 높아졌다”면서도 “너무 빠른 상업화에 따른 극심한 가격 변동으로 인해 지역의 독특한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복궁 마을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독특한 주거 공간이 갖는 매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공간을 지탱해 주는 건 유동 인구가 아닌 상주인구, 즉 주민이라는 점은 그간 간과돼 왔다. 그러는 사이 주민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서촌연구회 김한울 사무국장은 “카페·식당·주점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변화로 상주인구가 줄어들면서 이곳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며 “주민 공동체가 이곳 마을의 변화를 주도해야 하는데 지금은 돈이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셔널트러스트 최호진 기금사무국장도 “상업화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화로 끝나서는 안 된다”며 “서울시는 공간을 지켜낼 수 있는 공공 이용시설 등을 확보하고 주민 공동체를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보존 기로에 선 체부동교회의 서촌



아이들 사라진 골목엔 구경꾼만 넘쳐

카페·식당에 밀려 교회도 문 닫을 판




서울 서촌 옥인길(종로구 누하동)의 오래된 세탁소 만부크리닝은 2013년 11월 문을 닫았다. [사진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 제공]
경기대 안창모(건축학) 교수는 지난해 서울시의 ‘역사 도심 관리’를 자문하기 위해 서울 서촌의 체부동성결교회를 수차례 찾았다. 먼저 안 교수의 눈에 띈 건 붉은 벽돌이었다. 기도실이 1931년 교회로 건축되면서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식 벽돌쌓기 ’ 방식이 쓰였다. 해방 후엔 교회가 증축되면서 영미권의 영향으로 ‘영국식 쌓기 ’가 활용됐다. 이후 개·보수 과정에선 ‘길이쌓기 ’로 공사를 했다. 지금은 창문이 된 ‘작은 출입구’도 교회의 역사를 보여준다. 남녀가 유별했던 1900년대 초반 여성들은 쪽문으로 교회를 드나들었다.



 체부동교회는 조선 말기 중인들이 서구 문물을 직수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안 교수는 “일제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조선이 직접 근대를 만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교회의 가치를 평가했다.



 이렇게 가치 있는 체부동교회가 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 걸까. 서촌에서 꽃집을 운영 중인 한철구(45)씨는 “손님만 많아지고 주인(주민)은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성동계곡으로 이어지는 옥인길에 있는 지금 상가들 중 영업을 시작한 지 2년이 넘은 곳이 드물다. 오래된 목욕탕·세탁소·서점이 카페와 식당으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임대료와 권리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옛날 방식으로 동네 사람을 상대하던 가게들은 고사하고 있다.



 동네 사람을 상대한다는 점에서 체부동교회의 위기도 오래된 가게의 퇴출과 맥락을 같이한다. 염희승 담임목사는 “수많은 젊은 연인이 손 잡고 이곳을 찾고 있지만 이곳엔 뛰노는 아이가 없다”며 “2~3년 전부터는 교회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고 말했다.



 서촌을 보존하려는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은 오래된 일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한옥 선언’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박원순 시장이 준비하고 있는 ‘역사도심 재생계획’은 경복궁 인근 마을을 중점 대상으로 한다. 체부동교회는 역사도심 재생을 위한 중점 관리 대상 건축물 210동 중 하나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교인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서울시의 누구도 이 같은 사실을 주민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최근 몇 년간 경복궁 마을을 관리하는 인력과 부서는 크게 늘었다. 체부동교회의 공공매각과 관련된 시의 부서는 최소 4곳이다. 주택건축국 한옥관리과, 도시재생본부 역사도심재생과, 문화체육관광본부 문화재과·문화정책과 등이다. 교회가 공공매입 의사를 시에 전달한 시점은 지난해 7월. 시의 실무자는 탁상감정가(상권을 고려하지 않은 매매가)로 26억원을 전달했다. 교회는 손해를 보더라도 서울시에 팔고 싶다는 의견을 재차 전달했지만 답변을 받지 못했다. 염 목사는 “전문화·세분화된 조직이 오히려 결정을 늦추는 관료제의 역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교회(대지 467㎡·142평)의 시가에 대해선 몇 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부동산 컨설팅업체인 태경파트너스 박대범 본부장은 “도보 1~2분 거리의 대로는 평(3·3㎡)당 6000만원, 골목 안은 3000만원이다. 하지만 개발제한구역이어서 평당 3000만원 이하에서 거래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의견도 있다. 서촌은 북촌·삼청동과 마찬가지로 최근 15년간 10배 이상 땅값이 뛰었다. 재단법인 아름지기 장영석 사무국장은 “누가 서울시장이 돼도 서촌의 보존은 강조되겠지만 역설적으로 관광지로서의 가치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중개업자는 “50억원을 제시한 중국인의 판단이 몇 년 후엔 혜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했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민간단체인 아름지기와 내셔널트러스트는 ‘민간과 공공의 협력’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내셔널트러스트 김금호 사무국장은 “서울시와 민간이 반반씩 부담하는 방식으로 매입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 볼만하다”고 말했다. 올 6월부터 시행되는 ‘한옥 등 건축자산 진행에 관한 법률’은 민간이 보존을 위해 자산을 매입할 경우 공공기관이 이를 지원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스페인·이탈리아처럼 오래된 건물을 공공센터로 활용하는 아이디어도 있다. 종로구 측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거점으로 체부동교회 건물을 활용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서울시의 자금 지원이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글=강인식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만화 ‘풀하우스’ 작가 원수연의 삼청동



편의점·체인점·네온사인 없던 ‘3무’

가난한 예술가 반기던 마을 이젠 …




삼청동은 작가 원수연에게 많은 아이디어와 영감을 줬다. 1981년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하다. 원씨가 자신이 그린 ‘삼청동길, 기로에서’의 배경이 된 삼청동 골목길 가게 앞에 서 있다. [최승식 기자]


원씨가 그린 ‘삼청동길, 기로에서’.
그림을 좋아했으나 대학물을 먹지 못한 나의 스무 살은 삼청동에서 시작됐다. ‘풀하우스의 원수연’이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1981년. 내가 선택한 첫 직업은 음악 DJ였다. 현대화랑(현 갤러리 현대) 지하 1층 레스토랑 ‘준’의 한쪽에 내 자리가 있었다. LP를 찾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을 때도 난 늘 밖이 궁금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툭하면 삼청동 골목으로 나갔다. 평일엔 손님이 별로 없었으므로 북악산 기슭까지 휭 하니 다녀올 수 있었다. 그때 보고 듣고 만졌던 삼청동의 골목은 이후 내 작품 속으로 그대로 들어왔다.



 화려하지만 색감의 원형을 그대로 사용했던 앙드레 김의 의상실도 그땐 삼청동에 있었다. 그 시절 삼청동은 조용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거지역이었다. 골목엔 늘 밥 짓는 냄새가 가득했고, 아이들은 떼를 지어 집과 집 사이를 내달렸다. 그렇게 걷다 보면 기무사 건물(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색빛 담벼락이 걸음을 막아섰다. 사복 경찰을 만나는 건 일상이었다. 그때의 공권력은 스무 살 젊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 큰 처녀의 가방을 뒤졌다. 가방을 건네받은 나는 풀이 죽어 8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0대 초반을 삼청동에서 보낸 나는 홍대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렸다. 91년 ‘풀하우스’를 발표하면서 유명 만화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다시 찾기 시작한 삼청동은 여전했다. 2000년대 초반 삼청동은 ‘3무(無)’ 동네라 불렸다. 편의점, 프랜차이즈 가맹점, 네온사인. 이 세 가지가 없다는 뜻이다. 옛 추억과 현대식 문화가 절묘하게 뒤섞인 마을과 길. 그곳에선 한옥 처마 아래 걸린 현대미술 작품이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모퉁이를 돌면 보이는 작은 소품가게들은 보석처럼 빛났고, 나는 그곳에서 새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2001년 기무사의 서울시 외곽 이전이 확정되고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서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삼청동을 문화예술 거리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 일대는 청와대와 가깝다는 이유로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원래부터 집값이 저렴했다. 거기에 경복궁과 북촌이 자리하고 있어 문화적으로 풍부한 정서를 간직한 곳이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문화·예술을 향유하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98년 들어선 아트선재센터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서도호, 야요이 구사마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을 연이어 초청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였다. 센터 지하 서울아트시네마(현 씨네큐브 선재)도 2002년 5월부터 ‘피에르 파졸리니 특별전’ ‘히치콕 특별전’ 등 굵직굵직한 특별전을 개최하며 예술 영화관의 요람 역할을 했다.



 예술과 문학이 넘치는 거리엔 자연스레 카페들이 들어섰다. 2003년 문을 연 매혹적인 ‘커피팩토리’는 내 단골가게였다. 이미 그때 묵직한 로스팅 기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곳엔 늘 원두를 담은 자루가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팩토리였다. 원두의 신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81년의 삼청동으로 다시 돌아가 젊은 육체와 영혼으로 골목을 걷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커피팩토리는 2011년 문을 닫았다. 그 자리엔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키엘’이 들어섰다. 인근엔 일본 화장품 ‘SKⅡ’ 매장이 들어섰고. 아마도 삼청동이 완전한 상업지구로 바뀌면서 관광객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땅값과 임대료, 권리금은 몇 년 새 두 배가 뛰었다. 작은 커피집은 스타벅스와 커피빈으로 대체됐다. 저녁과 주말이면 발레 주차된 차로 모든 골목이 가득 차는 곳이 됐다. 누군가는 이것을 성장과 발전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정체성의 상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늙고 내 아이가 커가는 것처럼 결국 모든 게 변하는 걸까.



 삼청동은 행정구역이라기보단 하나의 길이다. 중학동 동십자각에서 성북동 삼청터널에 이르는 2.9㎞의 길. 조선시대부터 산·물·인심이 맑다고 해 삼청(三淸)이라 불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삼청’이 앞으로도 맑은 골목길로 남아줬으면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작가 원수연, 정리=장혁진 기자 analog@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만화 ‘궁’ 작가 박소희의 북촌



한옥 처마에 가려진 하늘, 낮은 돌담

‘사람’이 떠나면 이 집들도 변할 텐데




작가 박소희는 히트작 ‘궁’의 한옥 모델을 북촌에서 찾았다. 5일 북촌 한옥마을에서 박 작가가 차기작에 쓰일 이미지를 구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있다. [최승식 기자]


차기작 ‘공방의 마녀’는 아예 북촌을 배경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북촌(北村)에 작은 공방 하나를 남겼다. 염색한 조각보를 잇대고 수를 놓아 보자기를 만드는 가게였다. 기술을 모두 전수받기 전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가게가 있는 한옥을 몇 개 공방이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커피전문점이 건물 매입을 추진했다. 몇몇 공방은 흔들리고 있었다. 돈을 받고 떠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가치를 지킬 것인가. 나는 이제 물음에 답해야 한다.”



 달빛이 처마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밤, 나는 차기작 ‘공방의 마녀(가제)’를 구상했다. 지금의 나, ‘작가 박소희’를 있게 해준 ‘궁’을 그릴 때도 북촌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5년 전이었다.



 만화가의 꿈을 안고 부산에서 상경한 나는 가리봉(지금의 가산동)에 11만원짜리 월세방을 얻었다. 독립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북촌을 자주 찾았다. 서울아트시네마(현 씨네코드 선재)의 인디독립영화제는 단비와도 같았다.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며 걷던 북촌의 새벽 길에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시퀀스처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장면이 펼쳐졌다. 1970~80년대 모습 그대로의 목욕탕과 문방구. 한옥 처마에 가려진 하늘과 촘촘하게 쌓아올린 낮은 돌담들. 서울의 화려함보다는 어릴 적 자란 동네의 모습 같은, 아득하지만 가까운 느낌이었다.



 우아한 인테리어로 단장한 카페 앞을 지날 때면 커피 마실 돈이 없어 한참 동안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가난한 문하생 처지가 서글펐던 그 순간조차도 이젠 소중한 추억이 됐다. 작가로서 성공한 뒤 북촌에 들를 때마다 다시 그 카페를 찾으려 골목을 헤맸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어쩌면 이미 그 카페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이름의 커피 프랜차이즈로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나는 북촌에 빚을 지고 있다. 2001년 발표된 후 큰 사랑을 받았고 2006년(궁)과 2007년(궁S) 두 차례에 걸쳐 드라마로 제작된 ‘궁’. 궁궐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한옥’이었다. 장소 헌팅을 위해 안동 하회마을, 전주 한옥마을, 그리고 한국민속촌을 이 잡듯 뒤졌다. 작품 속에 등장할 한옥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지 못한 무엇을 나는 북촌에서 발견했다. 어느 날 북촌을 걷다 어느 작은 한옥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전통적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소박하고 실용적인 모습이 ‘궁’의 배경으로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알았다.



 사람이 직접 살고 있는 한옥과 그렇지 않은 한옥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사람이 살고 있어야 진짜 집의 느낌이 난다는 것을.



 이번엔 아예 작품의 공간을 북촌으로 설정했다. 다음달부터 북촌에 있는 한 게스트하우스에 2주간 머물 계획이다. 북촌 곳곳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요즘 내가 하는 유일한 일이다. 사진 찍기는 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언젠가 이곳이 변할 것이기 때문에 나의 사진은 언젠가 역사가 될 것이다. 북촌에서 사람(주민)이 떠나고 있다. 관광객은 2년에 세 배씩 늘어난다고 하는데 사람은 떠난다. 그러면 집도 변하게 돼 있다.



 종로구청 관광체육과에 따르면 2010년 말 기준 9563명이던 북촌 일대(가회동·계동·원서동 등) 주민 수는 지난해 말 8128명으로 줄었다. 거주환경 악화로 원주민이 마을을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최근 구청은 북촌 곳곳에 ‘조용히 해주세요’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2인 1조의 관광 도우미가 정숙관광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북촌에 밀려온 변화의 물결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골목에는 깃발을 든 가이드를 따라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넘쳐나고, 도로는 불법 주차된 관광버스로 뒤죽박죽이다.



 변화에 직면한 경복궁 마을. ‘공방의 마녀’의 주인공 미단이 처한 현실이다. 공방의 기원은 미단의 어머니의 어머니, 또 그 어머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과정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인지 모른다. 작가인 나도 미단이 어떻게 북촌에서 살아가며 자신의 직업과 꿈을 지켜가고 발전시킬지 궁금하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 아닐까.



작가 박소희, 정리=장혁진 기자

사진=최승식 기자





[S BOX] “삼청동 기무사 시절 ‘별’들이 단골 … 세탁소 안이 은하수 같았지”



‘나 그대와 둘이 걷던 그 좁은 골목 계단을 홀로 걸어요.’(서태지 9집 『소격동』)



 가수 서태지(본명 정현철)는 어린 시절 소격동에서 살았다. 그의 집이 현재 국제갤러리 오른편에 있던 단층주택이었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지금 그 집은 헐리고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태지 가족은 이후 평창동으로 이사를 갔다. 동네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강연복(50)씨는 “얼굴도 곱게 생기고 참 조용했던 학생”으로 서태지를 기억한다.



 “아버지가 음악 하는 것을 엄청나게 반대했지. 집 앞에 부서진 기타가 놓여 있을 정도였다니깐.”



 어쩌면 그의 교복이 다려졌을 세탁소도 그의 옛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아 있다. 삼청동에서 43년째 세탁소를 하고 있는 문모(65)씨는 기무사가 남아 있던 시절 높으신 분들로부터 ‘쪼인트’ 까인 장군들의 하소연을 듣곤 했다. “별 달린 장군들 옷이 수십 벌은 걸려 있었으니까 세탁소 안이 꼭 ‘은하수’ 같았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투 스타일 때부터 내가 군복 각을 잡았는데… 별이 하나둘 많아지더니 나중엔 대통령 되더라고, 허허.”



강인식·장혁진 기자 kang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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