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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넘게 매일같이 딩동댕 … 나만큼 열심인 뮤지션 못 봤다”

중앙일보 2015.02.14 00:13 종합 14면 지면보기
“연예인 얘기 다 자기 자랑이죠, 뭘 들으려고요. 공감할 내용도 별로 없어요.” 가인(歌人) 송창식(68)씨는 짐짓 거리부터 뒀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게 있었다. 그에게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책입니다. 문학·수학 등 되는대로 일곱 권을 가져왔어요.”


[박정호의 사람 풍경] ‘기타와 한평생’ 가인(歌人) 송창식
서울예고 수석 입학 … 돈 없어 중퇴
상거지로 살며 화성학·대위법 독학
‘쎄시봉’ 생활 전 노숙으로 겨울 두 번
다시 20대 된다면? 지금이 훨씬 좋아
군대서 국악, 감방서 재즈 편곡 공부
이 세상에 나쁘기만 한 건 없더라

 그의 얼굴에 하회탈 미소가 번진다. “오후 3시 기상, 그리고 1시간 동안 화장실에서 독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읽는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하하하. 한번 잡으면 목차부터 주석까지 한 자도 빠뜨리지 않죠.”



 - 최근 읽은 책은 뭐가 있나요.



 “제목이 뭐였더라, 진화생물학 얘기였는데. 저자가, 음, 그래요, 스티븐 제이 굴드의 『플라밍고의 미소』, 정말 잘 썼어요. 그런데 번역이 좀 걸렸어요. 영어 투가 많았죠.”



 - 왜 굳이 화장실에서 읽죠.



 “저 혼자 마음대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30대에 제 집을 장만하며 생긴 일과죠. 젊어선 꿈도 못 꿨죠. 독서도, 음악도 습관입니다.”



가수 송창식은 기인·외계인·천재 등으로 불린다. 밤낮이 바뀐 생활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제와 오늘이 한결같은 바른 생활 사나이다. “투박한 손이 내 삶을 닮았다”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언제나 웃는 멋쟁이



 지난 9일 월요일 밤 9시 송씨를 만났다. 경기도 하남시 신장동, 일명 미사리 라이브 카페 ‘쏭아(SSONGER)’에서다. 그는 매주 화·수·금·토·일 밤 10시 이곳 무대에 선다. 지난주 개봉한 영화 ‘쎄시봉’을 핑계로 그를 찾아갔다. 두 평 남짓한 그만의 소박한 대기실, ‘언제나 웃는 멋쟁이’와 마주 앉았다.



 - 신인 조복래가 송창식으로 나와요.



 “그 친구 노래 열심히 했어요. 예전 배우들은 음악영화라 해도 설렁설렁 불렀는데…. 역시 전문가들은 달라요. 50년 가까이 지난 소소한 얘기가 영화가 될까 걱정했는데, 희한하게도 끝내주게 나왔어요.”



 - 윤형주씨와 ‘트윈 폴리오’를 결성한 게 1968년입니다. 영화 속 20대를 보니 어떤가요.



 “영화는 영화죠. 제 20대와 별로 관계없어요. 쎄시봉에 오기 전에 노숙을 했죠. 요즘 같은 노숙이 아니에요. 지하도에서도 쫓겨났으니까. 그렇게 한데서 두 겨울을 났어요. 쎄시봉에선 먹고 잘 수 있고, 노래도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죠. 못할 게 없었어요.”



 -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요.



 “절대 사양입니다. 다시 여기까지 오라고요. 지금이 훨씬 좋아요. 만약 돌아가라면 저 혼자 잘 살고 싶습니다. 스트레스 없이 살았다고 해도, 장가도 가고, 아이도 있잖아요.”



라이브 카페 ‘쏭아’ 외경. 입구에는 송창식의 청춘이 담긴 앨범 사진이 장식돼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카페 이름 ‘쏭아’가 재미있네요.



 “어릴 적 별명이죠. 친구들이 제 성을 따서 ‘송아지’라고 놀렸어요. 저는 ‘싱어송라이터(sing a song- writer)’로 풀었죠. 90년대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제 아이디로 썼어요.”



 - 무대가 작지 않나요.



 “180석쯤 돼요. 제 전용무대입니다. 설계·건축·감리, 다 제가 했죠. 경기도 퇴촌에 집을 지으려고 건축설계를 5년간 독학했잖아요. 캐드(CAD·Computer Aided Design)도 배웠고요. 매일 노래하는 데는 카페가 최고입니다. 분위기가 매일 달라요. 기타리스트 함춘호도 종종 함께하고요.”



 - 컴퓨터 설계도 하세요.



 “새벽 두 시쯤 귀가해 잠이 안 오면 컴퓨터를 켜요. 새로 나온 부품이 뭐가 있는지 둘러봅니다. 조립도 직접 하죠. 항상 최신 상태를 유지해요. 주변에서도 윈도에 이상이 생기면 저를 찾을 정도죠. 컴퓨터는 논리적입니다. 음악도 그래요. 감성으로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지성이 따르지 않으면, 매일 닦지 않으면 훌륭한 게 나올 수 없죠.”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



영화 ‘쎄시봉’에서 송창식을 연기한 조복래.
 인터뷰 도중 송씨가 가장 자주 한 말은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다. 힘겨운 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도움이 됐다는 말이다. 달관이랄까, 득도랄까, ‘아름답고 철모르던 지난날의 슬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쎄시봉 바람이 끊이지 않네요.



 “그때를 생각하면 사실 좀 켕겨요. 화장실 다녀온 뒤에도 뒤끝이 말끔하지 않다고나 할까, 관객들은 추억을 즐긴다지만 저로선 좋다는 느낌이 그다지 없어요. 그래서 ‘트윈 폴리오’ 재결합도 안 해온 거고.”



 - 당시 젊은이들이 열광했잖아요.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이크’ 등 다 번안곡이잖아요. 우리가 좋아서 난리가 난 게 아니라 난리를 칠 만한 음악이 없었던 거죠. 원래 한국인은 엿이나 식혜를 좋아했는데, 갑자기 초콜릿을 들이댄 거죠. 진짜 초콜릿은 만들지 못하고 단지 흉내만 냈어요.”



 - 원래 클래식을 전공했죠.



 “서울예고 성악과 2학년 때 중퇴했죠. 워낙 가난해 레슨을 받을 수 없었고, 실기점수가 0점이었죠.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입학했는데…. 그래도 예고에서 음악 하는 법을 처음 배웠어요. 학교 그만두고 상거지처럼 살면서도 도서관·헌책방을 뒤지며 화성학·대위법 등을 맛있게 공부했어요. 눈 감는 순간까지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했죠.”



 - 한국 포크음악의 개척자로 불립니다.



 “팝송도 저렇게 부를 수 있구나, 조영남 선배에게서 충격을 받았어요. 제 전공도 팝으로 바꿨죠. 딴 데서 볼 수 없는 팝송을 하겠다고 맘먹었는데, 트윈 폴리오가 1년 만에 해체됐어요. 전셋돈 좀 벌려고 했는데, 하하하. 대신 작곡·발성법 등 저만의 음악패턴을 새로 익혔어요. 늘 말하듯 세상에 나쁜 건 없다니까요.”



 - ‘피리 부는 사나이’가 전환점이 됐죠.



 “명성이 쌓이나 싶더니 바로 군대에 갔어요. 아버지가 6·25 때 경찰로 순직해 군대 면제 케이스였는데, ‘특수자 명단’에 포함돼 징집됐어요. 유명세를 치른 거죠. 하지만 군 시절 음악적 전환을 이뤘어요. 아마추어가 참가하는 미군 흑인블루스대회와 전주대사습놀이를 접한 적이 있는데, 모두 저보다 잘하는 겁니다. 나는 상대도 안 된다, 제 자질을 처음으로 의심했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서양만 따라가선 안 되겠다, 국악도 공부해야겠다, 그렇게 나온 게 ‘피리 부는 사나이’입니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너무 많은데



 74년 제대 이후 송씨는 전성기를 맞는다. ‘한번쯤’ ‘왜 불러’ ‘고래사냥’ ‘맨 처음 고백’ 등이 히트를 쳤다. 75년 MBC 가수왕에 올랐다.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76년 대마초 파동 후유증, 77년 향토예비군법 위반에 따른 수감 등 시련이 닥쳤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너무 많은’ 때였다.



 - 속이 꽤 많이 상했겠어요.



 “웬걸요, 20일 감방에 있는 동안 재즈 편곡을 익혔어요. 전부터 한다, 한다 하면서도 못했거든요. 덕분에 앨범을 취입하거나 공연을 할 때 모든 악기의 편곡을 할 수 있게 됐어요. 모르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된다, 그게 제가 추구했던 음악이거든요.”



 - 1000곡을 만들었다는 말도 있는데.



 “오해입니다. 메모 형태로 적어둔 게 그 정도 되죠. 신곡을 만든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해요. 지난 50여 년 하루라도 연습을 건너뛴 날이 없어요. 기타는 잠시라도 쉬면 실력이 줄거든요. 요즘도 하루 두 시간가량 손을 풀죠. 나만큼 열심히 연습하는 뮤지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이 탓인지 템포가 예전 같지 않지만요.”



 - 87년 ‘참새의 하루’가 마지막 앨범이죠.



 “90년대 앨범 100만 장 시대가 열리면서 신곡을 발표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많이 팔 자신이 없었죠. 전 기본적으로 가수입니다. 똑같은 ‘왜 불러’도 옛 노래와 지금 노래가 달라요. 날마다 신곡을 부르는 기분이죠. 늙으면 늙은이다운 음악이 있어요.”



 - 요즘 사시는 건 어떤가요.



 “저작권료·공연료 등 1년 수입이 2억원 정도 됩니다. 충분하고도 남아요. 밥 먹고, 자동차 굴리고, 더 이상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제가 아직 배가 덜 고픈 걸까요, 돈 많은 친구들이 더 가지려고 애쓰는 걸 보면 이해가 안 돼요.”



 - 다음 주가 설날입니다.



 “워낙 없게 커서 그런지 설이 좋았던 적이 없어요. 친척 집에서 먹은 떡국 정도 떠오릅니다. 제가 아홉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가 그리워 전국을 헤맨 게 기억나네요.”





[S BOX] 중학생 때 미당 만난 송창식 …‘푸르른 날’‘선운사’ 만든 사연



1994년 12월 2일 미당(왼쪽) 팔순 잔치에 참석한 송창식. 그는 이날 ‘푸르른 날’을 불렀다.
2000년 10월, 당시 중앙일보 문학기자 이경철씨가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타계 두 달 전 병석의 미당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푸른 하늘을 보시라”는 기자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송창식군 노래를 말하는구먼. 그 사람 노래 참 기막히지. 내 시에 곡을 붙였다며 기타까지 메고 집으로 찾아와 노래를 부르는데 후련하게 확 터진 소리면서도 뭔가 서럽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눈부신 푸르름 속에도 설움이 있는데 우리 삶이야 오죽 서럽고 불쌍하겠는가.”



 히트곡 ‘푸르른 날’을 두고 한 말이다. 송씨는 중학생 시절 미당을 처음 알게 됐다.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에서 우연히 미당의 특강을 들었다.



 “시를 쓰는 방법을 일러주셨어요. 순간의 시상을 바로 옮기면 좋은 시가 안 나온다고 하셨죠. 감동의 알맹이를 차곡차곡 쌓아 나중에 책상 앞에서 풀어놓아야 한다는 말씀이셨죠. 제 작곡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고요.”



 20여 년 뒤 송씨는 시인 문정희씨와 함께 미당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미당은 “내 시 중에서 ‘푸르른 날’이 노래로 빚기에 좋다”고 했고, 송씨는 “제가 만들어 보겠습니다”고 선뜻 나섰다. 이후 미당에 대한 헌사(獻辭) 차원에서 ‘선운사’의 노랫말도 썼다.



 “미당은 동시대 사람이 아닌 조상님 같은 시인입니다. 시든, 산문이든 모든 작품을 구해 읽었어요. 특히 이야기를 주절주절 읊는 것 같은 『질마재 신화』(1975) 이후가 더 좋아요.”



 올해는 미당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송씨에게 감회를 물었다. “글쎄요, 무슨 말을 …. 저도 나중에 언젠가 그분을 뵐 텐데요, 뭘.”



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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