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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에볼라 공포가 현실이 된 날, 우린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 전우였다"

중앙일보 2015.02.09 15:37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24명의 ‘작은 영웅’들이 있다. 에볼라 바이러스 확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에서 치료활동을 벌인 긴급구호대(KDRT) 대원들이다.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서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 인근의 가더리치에 긴급구호대를 파견했다. 1진 9명은 4주 동안의 활동을 마친 뒤 지난달 26일 귀국, 에볼라 바이러스 잠복기인 3주 동안 자발적 격리 과정 중에 있다. 1진 대원 1명은 현지 활동 도중 에볼라 감염이 의심돼 독일로 후송됐고, 비감염 확정 판정을 받고 조기귀국했다. 2진 9명은 오는 20일, 3진 5명은 다음달 21일 현지 활동을 마무리한다.

정부는 이들의 신변 안전 등을 고려해 신원과 관련된 정보나 사진은 일체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9일 처음으로 본지에 소회를 털어놨다. 공포와 희망, 기적과 절망이 교차했던 순간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되돌아봤다. 1·2진 구호대원 가운데 일부가 보내온 활동기를 내러티브식으로 정리했다.

2014년 12월30일. 치료소 근무가 이제 손에 익어가기 시작하던 때 ‘설마 내게 그런 일이…’라고 생각하던 일이 동료 대원에게 현실이 됐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야간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하는데, 근무 순번이 아닌 의료대장과 지원대장이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불길한 사고가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동료 대원 한 명의 손가락이 주사바늘에 스치는 사고가 생겼고, 후송을 고려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일단 사고당한 대원을 안정시키고 회의 결과를 기다렸다. 너무도 어두운 밤이었다. 나도 감염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다신 사고당한 대원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긴 밤을 보냈다.

이튿날 외교부 본부는 독일 병원으로의 후송을 결정했다. 출국 전 정부에서는 감염시 후송 대책과 매뉴얼을 일러줬다. 매뉴얼에서 글로 보던 내용들이 현실로 다가오니, 우리 임무가 단순히 누군가 치료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목숨까지 연결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소식은 빠르게 치료소 전체로 퍼졌다. 다른 나라 소속 의료대원들이 사고 대원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울컥 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국적과 관계 없이 우리는 모두 전우였다. 처음엔 나이가 어려 보인다고 무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적극적 치료 활동을 벌이는 우리가 존경스럽다고 해줬던 이들이다. 나는 치료소를 지키느라 독일로 떠나는 동료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매일 독일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모든 검사에서 음성이 나왔단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감사했는지…. 시간이 흐르면 지금 이 팀원들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마음 졸이며 걱정과 불안, 안도를 공유했던 이 순간의 기억만은 옅어지지 않을 것이다. <1진으로 파견된 30대 여군 간호사>

치료소에서 근무를 시작하는 순간 나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치료받던 환자 30여명 중엔 살아났음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본인은 완치됐지만 가족을 모두 잃어 슬퍼하는 이도 있었다.

환자들이 퇴원할 때면 모든 의료진이 도열해서 나가는 길을 동행했다. 완쾌를 축하하는 하나의 작은 의식이었다. 우리는 이름 모를 환자 한명에게 작은 정성을 다한 것 뿐이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은 삶 자체를 다시 얻었다는 생각을 했다. 구호대원으로서의 역할에 전율이 느껴졌다.

시에라리온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자 사방이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우리처럼 구호활동을 벌인 국제의료진이었다. 시에라리온에 올 때와 비교하면 얼굴도 타고 머리도 헝클어진 피폐한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더 좋아보였다. 그들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를 해주고 싶었다. 일해본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아니까.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중단하고 1진 의료진에 자원한 20대 여성 간호사>

일곱살 된 여자 어린이 환자가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침대에 누워있기만 해 의료진의 속을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회진중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여의사가 보라색 매니큐어를 아이에게 보여주자 스르륵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었다. 혼자서는 잘 앉지도 못하던 아이가 일어난 것을 보니 기특한 마음에 헐레벌떡 본부에서 보낸 긴급 식량 중 초코 과자를 찾아 들고 왔다. 통 먹지 못하던 아이가 냉큼 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본 순간 아이가 살아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에라리온의 어린이, 남아공의 여의사, 그리고 멀리 한국에서 파견된 군의관. 어느 하나 공통점이 없던 우리 관계는 작은 치료소 안에서 강한 연대감을 상징하는 무엇으로 바뀌어 있었다.

몸집이 유독 컸던 남성 환자도 기억난다. 그는 큰 바늘이 달린 정맥주사를 팔뚝에 꽂아도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을만큼 참을성이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전화 한통을 받더니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주고 받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환자의 딸이 한 전화라는 말을 듣고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나 부모 자식간은 똑같은 것 같다. 이 가족이 더 큰 아픔을 겪지 않도록 더 정성껏 치료해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2진으로 파견된 남성 군의관>

시에라리온에 가게 됐다는 소식을 부모님께 전할 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반응이 의외였다. “네가 지원할 줄 알았어. 그런데 그렇게 아픈 사람들 치료하러 가는 건데, 한 달은 너무 짧지 않니? 1년은 갔다와야지.” 어머니의 응원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파견된 직후 너무 많이 우셨다고 했다. 구호대 파견 기사에 달린 악성 댓글 때문이었다. 왜 말리지 않았느냐는 원망을 들을까봐 친척 분들께 말씀도 못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내가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온 지금은 되레 “딸 자랑하고 싶은데, 남들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니?”라고 물어보신다. <1진으로 파견된 20대 군 간호사>

사실 구호대에 합격하고 나서도 가야할 지 망설였다. 하지만 오히려 아버지가 적극적이셨다. 안그래도 구호대를 모집한다는 뉴스를 보며 ‘우리 딸은 지원 안하나?’ 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귀국한 뒤 아버지는 큰 꽃다발을 들고 격리 시설로 찾아오셨다. 함박웃음과 함께 “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씀해주셨다. 날 꼭 안아주고 싶다고 하셨지만, 에볼라 바이러스 잠복기가 끝나지 않아 안아주지는 못하셨다. <1진으로 파견된 30대 민간 간호사>

처음 구호대가 도착했을 때 시에라리온 사람들에게 ‘한국=박지성’ 정도의 인식이 전부였다. 현지에서 영국 축구가 계속 방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떠날 때쯤엔 이런 인식이 바뀌었다. 치료소에 근무하거나 치료를 받은 시에라리온 주민들은 이제 한국 긴급구호대를 한국의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

선발 대원들은 대부분 언론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국민들이 우리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늠하곤 했다. 다행히 처음보다 댓글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격려의 글도 점점 많아져 대원들이 많은 힘을 얻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어려움에 우리가 좀더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외교부 원도연 지원대장>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사진설명=시에라리온 현지에서 에볼라 감염 환자 치료 활동을 벌이는 대한민국 구호대원들. [사진 외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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