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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로빈훗을 기다린다

중앙선데이 2015.02.07 04:02 413호 30면 지면보기
‘썩 재미있지만 영 색깔이 없다.’ 지난해 창작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느꼈던 개인적 감흥이다. 유럽 뮤지컬 ‘삼총사’ ‘잭더리퍼’ 등을 통해 이미 ‘믿고 보는 제작진’으로 인정받은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음악감독 콤비의 작품인 만큼 뮤지컬 흥행공식을 정교히 적용한 세련된 무대로 뮤지컬상을 휩쓸기는 했다. 하지만 세계시장을 겨냥한다면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으로 점철된 무대라니, 한류스타의 도움 없이 세계시장에서 한국 창작뮤지컬이라고 어필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뮤지컬 ‘로빈훗’, 3월 29일까지 디큐브아트센터

왕·이 콤비는 오히려 독일 뮤지컬 ‘로빈훗’을 통해 제 색깔을 찾은 듯하다. 최근 막을 올린 뮤지컬 ‘로빈훗’은 2005년 독일에서 초연된 작품이지만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작됐다. 중세 유럽을 배경 삼은 고전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가 크게 공감할 수 있는 무대로 빚어냈다.

로빈훗은 본래 12세기 잉글랜드 민담에 등장하는 전설 속 인물. 14세기 처음 문학작품으로 기록된 이래 꾸준히 변형되어 왔다. 부자를 약탈해 빈자를 돕는 의적인 건 변함없지만, 이번 무대는 왕위 찬탈 음모 속에 적통 왕위계승자를 돕는 이야기로 변모된 스토리 상 ‘의적 로빈훗’이라기보다 ‘충신 로빈훗’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노팅엄의 군인 로빈훗은 십자군 전쟁 중 친구 길버트의 음모로 리처드왕을 죽인 누명을 쓰고 쫓기다 셔우드 숲의 의적이 된다. 실제 역모를 꾸민 길버트는 노팅엄 영주가 되어 리처드의 동생인 존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지만, 로빈훗은 적통 왕위계승자인 필립 왕세자를 도와 이에 맞선다.

사실 이런 구도 자체는 식상할 정도로 진부하다. 옛날 유럽을 배경삼아, 믿었던 친구의 음모로 자신은 물론 나라 전체가 위기에 처하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뺏겼다가 우여곡절 끝에 질서를 되찾는다는 이야기는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조로’ 등 기존 유럽 뮤지컬을 빼닮았다.

하지만 이 무대는 그런 한계를 상쇄해주는 장점들로 가득하다. 분위기부터 독특하다. 통상 유럽 뮤지컬은 웅장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위엄을 잡는다. 유머코드는 양념처럼 살짝 얹어주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로빈훗’은 다르다. 1막엔 거의 ‘코믹 뮤지컬’이라 불러야 하나 싶게 작정하고 웃겨준다. 중후한 저음의 소유자로 평소 근엄한 역할을 주로 맡던 조연 서영주가 온몸을 던져 분위기를 띄운다.

주연배우 중에서는 ‘규현의 재발견’이 돋보인다. 그간 꾸준히 쌓아온 공력이 빛을 제대로 발하고 있다. 그동안 아이돌이라 한 수 접어주고 보아 왔다면, 이제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모두 뮤지컬 배우로서 톱 레벨의 경지에 올랐다. 아이돌 출신다운 무대 매너와 타고난 왕자포스는 덤이다.

흥행공식도 완벽하다. 한국인 취향에 맞게 시원하게 질러주는 넘버들도 많고,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세트와 영상을 적절히 활용해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스펙터클한 무대미술, 주인공들의 내면을 묘사해 예술성까지 느껴지는 역동적이고 절도있는 군무도 과하지 않고 딱 적절했다. ‘뮤지컬 제작의 달인’들답게 똑 떨어지는 무대미학을 구현했다.

그러나 이 무대의 백미는 화끈한 현실 풍자다. 별생각 없이 유유자적 살던 왕자가 시해당한 아버지의 자리를 되찾고 새로운 영국을 건설해 백성들을 잘 살게 하겠다며 반드시 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부터 그렇다. 뿐만 아니다. 백성들은 세금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왕실이 세금을 너무 걷어서 차라리 도둑이 돼버린 지경이다. 로빈훗은 세금 마차를 습격해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도둑무리의 리더가 된다. 유독 자주 들리는 ‘세금’이란 단어에서 최근 연말정산 사태와 복지 논란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엔딩에 숨겨진 두 번의 반전은 풍자의 화룡점정을 위한 고도의 트릭이다. 필립이 왕이 되고 해피엔딩인가 싶더니 정말 끝인가 싶은 순간 다소 급작스럽게 막을 내렸던 1막 엔딩으로 점프해 숨겨진 이야기를 펼쳐낸다. 왕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필립을 로빈훗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한대 후려친다. ‘왕이 되면 정치를 잘하는 자에게 정치를 맡기고, 세상 이치를 잘 아는 자에게 법을 만들게 하고, 정직한 자에게 권력을 주라. 우리는 세상을 뒤엎으려는 게 아니라 단지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만을 원한다’면서. 굳이 이런 낯선 구조를 택한 건 왜일까. 권력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 아닐까. 로빈훗은 신하지만 ‘자식같은’ 필립을 아끼는 만큼 추상같다. 그래서 영웅이다. 우리도 ‘충신 로빈훗’을 기다린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엠뮤지컬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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