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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상위 0.1%의 시계 ‘RM’ 만드는 리샤르 밀

중앙일보 2015.02.07 00:22 종합 16면 지면보기
시계 디자이너 리샤르 밀은 “부자 고객들은 멀리서도 단번에 무슨 시계인지 알아볼 수 있는 개성 강한 디자인을 원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미국의 벤처캐피털리스트 톰 퍼킨스가 CNN 방송과 인터뷰 도중 손목에 찬 시계를 자랑했다. 퍼킨스는 시계 값이 “롤렉스 시계 몇 개 살 정도(a six- pack of Rolexes)”라고 말했다. 그의 순자산은 80억 달러(약 8조6600억원)다. 퍼킨스의 손목에는 38만 달러(약 4억1100만원)짜리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롤렉스 시계의 인기 제품 가격은 1500만~2000만원이다. ‘식스팩(six- pack)’은 병이나 캔으로 된 음료 6개들이 한 묶음이다. 그러니 그가 자랑한 시계 값은 대중이 ‘명품 시계’라고 하는 롤렉스 20개를 사고도 남는 금액이다.

“나달이 차고 뛸 20g시계 요구에
기술팀, 날 정신나간 놈 보듯”



 세계적인 부호가 방송 인터뷰 도중 자랑할 정도로 비싼 이 시계는 프랑스 시계 디자이너 리샤르 밀(Richard Mille·64)의 작품이다. 밀은 그의 이름을 딴 브랜드 ‘리차드밀(Richard Mille·이하 RM)’의 대표다. RM은 2013년 한국에 진출했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 1층에 매장 딱 한 개를 열고 영업 중이다.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대표, 그룹 ‘빅뱅’의 G- 드래곤 등이 RM 시계 매니어로 알려져 있다. 양 대표와 G- 드래곤이 RM 시계를 찬 모습은 방송 등에서 수차례 노출된 바 있다. RM 시계는 ‘초고가 시계’로 알려져 있다 보니 ‘누가 샀다는 얘기가 나오는 즉시 정보를 입수한 과세 당국이 구매자의 세무조사를 한다’는 미확인 소문까지 나도는 실정이다. 한국 진출 1주년을 맞아 방한한 밀은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시계 산업은 최근 수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들 브랜드는 100년, 200년 전 기술을 갖고 ‘구닥다리 복원품(stupid copy)’을 만들고 있을 뿐”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 최고급 시계 브랜드는 100~2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이런 전통을 기반으로 혁신적인 모델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글쎄, 동의하기 어렵다. 몇몇 브랜드는 수백 년 전 역사에 남아 있는 이름만 빌려 쓸 뿐 진짜 그 시대의 시계 제작자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다들 그 이름을 내걸고 유산(遺産)을 강조한다. 그건 가짜(false legacy)일 뿐이다. 마치 최신식으로 현대화된 자동차공장에서 구식 모델을, 그것도 예전 기술로 만드는 꼴이다. 그러면서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가격을 고민하며 기술적으로 타협한 제품을 낸다. 이게 싫어서 내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



 - 더 큰 시계 회사, 기술 개발에 거액을 투자할 수 있는 브랜드가 언제든 RM을 베낄 수도 있다.



 “신경 안 쓴다. RM만큼 창의적인 시계를 만들 능력이 없으니까.”



 2012년 RM은 약 2500개의 시계를 팔아 1억1200만 스위스프랑(약 1300억원)의 연 매출을 올렸다. 시계 한 개의 평균 가격이 어림잡아 5200만원이다. RM의 성장성을 눈여겨본 명품그룹 케어링(Kering) 등이 최근 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케어링은 브랜드 ‘구찌’ 등을 거느린 세계 3위(연 매출 기준) 명품그룹이다. 그는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타협하기 싫어서”라고 했다.



 밀은 1999년 RM 설립 전까지 프랑스 보석회사 모부생(Mauboussin)에서 세일즈를 담당했다. 90년대 초 모부생이 시계 제조업에 진출하면서 시계 산업과 연을 맺었다. 그는 스위스 고급 시계 회사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회사를 세웠다. 밀의 첫 번째 작품 ‘RM001’은 2001년 처음 나왔다. ‘고급 시계 중 고급 시계’임을 드러내는 장치 ‘투르비용’을 달고 가격은 20만 스위스프랑으로 책정됐다. 투르비용은 시간 오차를 줄이는 장치다. 당시 고급 시계 브랜드 대부분은 투르비용이 달린 시계를 그 절반 값에 팔고 있었다. 여느 고급 시계 브랜드 두 배 값에다 80개 한정판으로 생산된 RM001은 금세 매진됐다.



스타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2011년 세계적 권위의 테니스 대회 ‘프랑스오픈’에서 우승한 그는 오른쪽 손목에 무게 약 20g에 불과한 ‘리차드 밀’의 시계 ‘RM027’을 차고 경기를 치렀다. 큰 사진은 탄소섬유로 만든 시계 ‘RM011’. 한국 판매 가격은 1억6071만원이다. [사진 리차드밀]


 - 창업 때부터 고급 시계 소비자 중에서도 최상위층만을 겨냥한 것인가. 일부 언론은 이를 ‘엘리트를 위한 시계’라고도 했다. 결국 RM의 전략은 ‘매우 높은 가격’과 ‘한정판’이란 요소로 소비자를 안달 나게 하는 것인가.



 “가장 앞선 기술을 적용해 가볍고 편한 시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자면 혁신이 필요했고 F1 같은 최신 자동차공학과 우주선 소재 등에 관심을 뒀다. 나노 파이버, 알루미늄과 티타늄 합금, 사파이어 글라스 같은 소재다. 신소재를 사용해 실패·성공을 거듭해 가며 만들었다. 일일이 부품을 손으로 깎고 다듬어 조립한다. 지금도 여전히 40% 이상이 제작 과정에서 불량품으로 폐기된다. 그러니 시계 가격이 자연스레 높아지게 됐다.”



 - 고급 시계 브랜드는 자사의 제품들이 ‘초정밀기술과 최고 장인정신의 결정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가벼운 무게’에 집착하는 건 지나치게 실용적인 접근이다.



 “수천만원, 수억원을 주고 샀는데 무겁다고? 바보 같은 소리다. 손목에 찼으니 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스페인 테니스선수 라파엘 나달을 브랜드 모델로 쓰고 싶어 만났다. 모델이니 경기할 때도 시계를 차야 한다고 제안했더니 거추장스러워 싫다더라. 나달을 만나고 돌아와 회사 기술팀에 ‘무조건 가볍고 편안한 시계를 개발하라’고 주문했다. 20g 정도로 말이다. 우리 팀이 날 보면서 일에 너무 몰두하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하는 표정으로 ‘가서 좀 쉬고 오시라’고 하더라. 기술팀도 애초에 불가능한 미션이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RM은 해냈다.”



 2010, 2011년 스타 테니스 선수 나달은 RM027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시곗줄을 포함해 무게는 20g가량이었다. 가격은 52만 달러(약 5억6300만원). 지난해 나온 후속 모델 RM027- 1의 무게는 19g이다.



 - 초고가 시계라 어차피 고객도 극소수일 테니 한정판을 만드는 것인가.



 “그래도 만드는 숫자보다 원하는 손님 수가 더 많다. 그래서 구하지 못한 사람을 화나게 하고 때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 어느 누구의 청탁이 있다고 해도 물건을 먼저 받거나 품절된 걸 다시 살 순 없나. 어차피 새로 하나쯤 만들면 될 텐데.



 “이탈리아 시칠리아의 한 시계 판매상이 다 팔리고 없는 한정판을 구해 달라고 애걸복걸한 적이 있다. ‘시칠리아=마피아’다. 시계를 못 구하면 그가 위험에 처한다고 애원했지만 없어서 못 파는 걸 어쩌겠나. 한 2년 기다리면 다음 모델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가 아직 살아 있느냐고? 글쎄, 시칠리아든 어디든 살아 있겠지.”



 - RM은 결국 ‘수퍼카’처럼 많은 사람이 동경하지만 실제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 상품이다.



 “매우 높은 가격 탓이지. 당연히 아무나 살 수는 없다. 한데 돈이 없어 살 형편이 못되는데도 RM 시계의 팬인 사람도 많다. 돈이 다는 아니다. 시계에 대한 열정이 중요하고 난 그걸 존중한다. 그들에게 ‘RM 부티크에 나와 구경해 봐라. 사든 안 사든 중요하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말한다. 제품을 통해 내가 추구하는 걸 보여 주는 게 좋아서다. 팬들이 매장에서 시계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면 ‘기꺼이 그러시라’고 한다.”



 인터뷰 중 그의 손목을 보니 한쪽엔 RM, 한쪽엔 삼성전자의 스마트 시계 ‘기어’를 찬 모습이 눈에 띄었다.



 - 양손에 시계라니 어색하지 않은가.



 “전혀. 뭐가 이상한가. 기어 같은 스마트워치는 예의 바르게 비즈니스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다. 중요한 상대와 만나고 있을 때 급한 연락이 왔다고 치자. 그때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는 곁눈질로 조용하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삼성의 갤럭시 휴대전화를 쓰니 기어를 찬 것이다.”





[S BOX] 탄소나노튜브, 사파이어 글라스, 해골 무늬 … 색다른 ‘리차드밀’



2013년 스위스시계산업연합회(FHS) 자료에 따르면 2009년 이후 스위스산(産) 시계 수출은 세계 경기 불황에도 불구하고 매년 늘었다. 그중에서도 고급 시계로 분류되는 ‘기계식 시계’가 성장을 주도했다. 기계식 시계는 태엽장치를 동력원으로 삼는다. 한데 ‘고가 시계의 대명사’로 불리는 브랜드 ‘리차드밀’의 리샤르 밀 대표는 이 시장이 “허울뿐인 유산(遺産)을 등에 업고 서로 베끼기에 급급한 전쟁터”라고 했다.



 태엽(胎葉), 즉 ‘스프링’이라 부르는 리본 형태의 나선형 금속이 시계를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는 15세기 유럽에서 개발됐다. 현재 치열하게 경쟁 중인 최고급 시계들은 태엽 손목시계라는 원형을 바탕으로 기술적 진보를 거듭했다. 절삭 공구와 합금 등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더 정확하고 더 정밀한 기계식 시계가 탄생했다. 수백 년에 1초 정도로 시간 오차를 줄여 주는 수억원대 장치 ‘투르비용’ 탑재 시계 등이 그런 예다.



 기술 발전 다음 단계는 꾸미기다. 내로라하는 브랜드가 모두 경쟁적으로 내놓는 에나멜 기법의 시계판이나 섬세한 보석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시계들이 그것이다. 리차드밀 역시 기계식 시계를 만들고는 있지만 전통적인 금속 소재 대신 탄소나노튜브 같은 첨단 신소재와 아이폰 등에 쓰이는 사파이어 글라스 등을 써서 차별화에 나서고 있다. 이 브랜드는 시계 장식도 고전적인 세공 대신 거리 감성 충만한 해골 무늬를 쓰는 등의 방법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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