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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길!] 나는야, 계획 세우는 사람

중앙일보 2015.02.07 00:03 종합 29면 지면보기
한비야
구호활동가
이화여대 초빙교수
“어이구, 저 계획쟁이, 또 붙여대기 시작하는군.”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온갖 모양의 계획표를 만들어 벽에 붙이는 걸로 유명했다. 아무리 말리고 혼내도 한번 붙인 계획표는 절대로 떼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벽에다 한 번만 더 붙이면 혼날 줄 알아”라고 했더니 다음날 천장에다 도화지에 큰 글씨로 쓴 계획표를 떡 하니 붙여놓았단다. (이 사건은 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엄마한테 야단맞을 줄 알았는데 칭찬받았던 것 같다. 아닌가? ㅋㅋㅋ.)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가, 나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주일, 한 달, 1년, 10년 단위의 시간별은 물론 구호현장 활동, 세계시민학교 활동, 내 공부 등 주제별로도 구체적인 계획을 짠다. 보통은 일기장에만 써놓지만 현재 집중 중인 프로젝트는 일정표와 프로젝트 키워드를 거실 벽에 붙여놓고 매일 들여다보며 전의(?)를 다진다.



 새 책을 쓰고 있는 지금도 거실 벽에는 새 책의 각 장 원고 최종 마감일, 출간 일정표, 임시 목차 그리고 ‘왜 이 책을 쓰는가?’ ‘무엇이 본질인가?’ ‘이 온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나의 꿈을 넘어서 우리의 꿈으로’라는 키워드가 사방에 붙어 있다. 그뿐인가. 책 관련 재미있는 에피소드, 좋은 비유, 멋진 문장들이 떠오를 때마다 형형색색 포스트잇에 써서 붙여놓아서 지금 우리 집 거실은 ‘무당집’을 방불케 한다. (집필이 끝나기 전 누가 우리 집에 불시에 올까봐 겁난다.)



 나는 이렇게 계획 세우는 게 신나고 재미있다. 마치 여행 자체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가 더 즐거운 것처럼 말이다. 계획의 첫 단계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돈 에너지, 예상되는 물심양면의 도움 등의 목록을 씨줄로 만들고 그 일의 순서, 단계별 성취 목표, 실행계획 등을 날줄로 만든다. 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짠 계획을 큰 도화지나 공책에 세부 일정을 곁들여 형형색색 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으면 어떤 크고 복잡한 일이라도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안심이 되어 일할 엄두가 난다.



  40년 묵은 이런 습관이 긴급구호활동에 이렇게 큰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긴급구호 현장 책임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앞으로의 일을 예상하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재난의 크기와 영향력, 해당 국가와 주민들의 재난 대응 능력, 후원국과 국제기구, 기업 및 개인의 후원 규모, 주변국과의 관계 등을 종합해 최초 일주일, 30일, 90일, 6개월, 1년 그리고 1년 이후의 단계별 구호활동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뿐인가. 단계마다 외부 및 내부 상황이 최악인 경우, 최선인 경우, 가장 현실 가능성이 큰 경우 등을 감안한 세 가지 계획서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긴급구호 시작 단계부터 철수할 때 우리 활동을 현지 정부와 주민에게 이양할 계획도 세워야 한다. 구호활동 기간이 1년이라고 할 때 기본적으로 써야 하는 계획서만도 20가지가 넘는데 이 일을 얼마나 정확하게 빨리 하느냐에 따라 현장 구호활동의 질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의 계획을 세울 때 더욱 가슴이 뛰고 머릿속 혈관이 팽팽해진다. 특히 남들 보기에 너무 허황돼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면 더욱 그렇다. 좋은 예가 세계일주다. 열 살 전후 시작된 세계일주 계획은 처음엔 막연했지만 중·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추가하고, 유학에서 돌아와 회사에 다니던 3년 동안 예산에 맞게 매달 저축까지 하면서 더욱 확고해져 내 나이 서른세 살에 마침내 세계일주 길에 올랐으니 이야말로 계획의 승리가 아니겠는가?



 물론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 일기장에는 10년 이상 계획만 하고 있는 일도 수두룩하다. 그중에는 체력의 한계나 나이 제한 등의 이유로 이미 때를 놓쳤거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도 있다. 그렇다고 그 일들을 내 일기장에서까지 지워버릴 생각이 없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종국에는 색다르고도 기상천외한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면 그만이다. 해볼 때까지 해봤으니 후회도 미련도 없을 테니까.



 이런 과도하고 무리한 계획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자괴감을 줄 수 있으니 그러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일리 있는 충고지만 나는 계획을 세운 덕분에 단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면 그만큼은 남는 거라고 굴뚝같이 믿는다. 내가 세운 계획 중 반의 반의 반만 이루어도 그게 어딘가. 계획한 일마다 다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 단언컨대 내가 이룬 일 중에서 계획 없이 이루어진 일은 단 하나도 없다.



  새해를 시작하며 야멸차게 세운 계획이 흐지부지되고 있다면 다가오는 설날에 새로운 마음으로 그 계획을 수정·보완해 보면 어떨까?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가 아니라 ‘가다가 중지하면 간 만큼 이익’이라니까요!



한비야 구호활동가 이화여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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