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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 대통령의 시간 2008-2013(개정판)

중앙일보 2015.02.07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1장. 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



 (…) 1996년 4월 15대 총선에서 나는 이종찬,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내부 고발이 터져 나왔다. 비서 김모가 내가 “법정 선거비용(9500만원)의 7배가 넘는 6억8000만원을 뿌렸다”고 폭로한 것이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린 셈이었다. 김모를 달래 비행기표와 1500만원을 주고 홍콩으로 보냈다. 폭로가 사실이 아니라는 번복 편지도 쓰게 했다.



 하지만 회유 사실까지 밝혀지고 말았다. 김모를 도피시킨 혐의로 비서관들이 검찰에 체포됐다. 당 사무총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직원들이 충정의 심정에서 뜻밖의 일을 했다. 종교인으로서 약속할 수 있다. 사실과 다른 게 나오면 책임지겠다.”



 1심에서 유죄가 인정돼 벌금 400만원이 선고됐다. 의원직을 던져 버렸다. 식물인간이나 다름없게 된 국회의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일찌감치 그만두고 새 출발을 하는 편이 나았다. 98년 서울시장 선거라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2심에서도 유죄 판결이 나왔고 시장 후보 경선을 포기해야 했다. 99년 대법원은 일부 무죄마저 파기 환송했다. 결국 벌금이 700만원으로 올라갔고 피선거권이 박탈돼 5년간 공직선거에 나가지 못하게 됐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은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돼 정치 재개의 길이 열렸다. (…)



 2장.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없다



 (…) 촛불 집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밤, 나는 청와대 관저 뒷산에 올랐다. 시위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아침이슬’ 노랫소리도 들렸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지만 내가 만든 서울광장과 내가 복원한 청계천이 집회장소가 되는 걸 보고 열불이 났다. 당시 시위를 강력 진압해 법치를 세워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압박도 컸다. 그 주장에 일리가 있었다. 나는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당부했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대처해주세요.” 그는 영리하고 충직했다. 경찰은 광화문에 컨테이너 박스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명박산성’이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청와대가 시위대에 점령당하는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



 8장.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하여



 (…) 해외 자원 개발의 총괄 지휘에는 한승수 국무총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 큰 역할을 한 것은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왕차관’ 박영준 지식경제부 차관이었다. 비리 의혹과 퇴진 압박에 지쳐 자원외교 특사를 자처했던 형은 중남미와 중동, 중앙아시아 12개국을 누볐다. 이 경험을 묶어 『자원을 경영하라』라는 책도 펴냈다. 영준이는 주로 아프리카를 맡았다. 이들이 두 대륙에서 약속한 투자사업은 총 19개 사업으로 4조3417억원이 투자됐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자원외교의 정점엔 내가 있었다. 2008~2012년 사이 맺은 광물자원공사의 자원개발 양해각서는 내가 사인한 게 21건이며 특사가 11건, 총리는 3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35건 중 본 계약 체결로 이어진 건 2건뿐이었다. 그것도 자원 개발이라기보단 기존의 광산에 대한 지분 투자에 불과했다. 당시 이미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정부 출연기관인 에너지경제연구원은 2012년 11월 “자원보유국과의 접촉 건수만 성과로 척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체계적 접근보다 단기 대응에 치중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치를 몰라 하는 소리였다. 당장 내세울 치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성과는 최소 5년 후에야 나올 텐데 말이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반성문을 두 번 대신 썼었다. 과거 흠결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던 취임 연설을 듣고, 그리고 그렇게 출발한 정부가 자평한 1년 성적표 역시 반성 대신 자찬 일색이었을 때였다. 하지만 그때조차 대통령의 회고록까지 대신 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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