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추락하는 중산층, 날개는 있나

중앙일보 2015.02.02 00:05 종합 28면 지면보기
정철근
논설위원
20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경제가 수렁에 빠져 있을 때다. 그해 버락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미국 연수 중이었던 나는 오바마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 남부 13구역을 가고 싶어졌다. 그는 이곳에서 주 의회 상원의원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이 지역은 시카고대 주변의 중산층 지역과 서쪽 흑인 빈곤층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경제학으로 유명한 시카고대와 인근 과학박물관도 들러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차를 갖고 가지 않고 트램을 이용한다는 게 잘못된 판단이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다운타운을 벗어나자 살풍경이 펼쳐졌다. 차창 밖의 건물들은 대부분 낡았고 유리창이 깨진 곳도 많았다.


높은 집값·교육비로 위기에 빠진 한국 중산층
세제·건보 개편서 불이익 받으면 저항 커질 것

 시카고 남부의 가필드역에 내리자 역 앞 햄버거 가게의 유리창은 깨져 파편이 길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 있던 장신의 흑인 한 명이 우리 가족에게 걸어오더니 돈을 요구했다. 뭘 먹었는지 눈의 초점이 풀려 있었다. 대낮인데도 식은땀이 났다. 다행히 버스가 바로 도착해 봉변은 면했다.



 돌아올 때는 상당한 돈을 주고 택시를 탔다. 오는 길엔 미시간호를 따라 고급 콘도와 빌딩들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한 도시에 이런 극단적인 모습이 병존하다니 미국의 심각한 빈부 격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해 미국은 중산층 몰락이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자동차 산업 침체로 직격탄을 맞은 디트로이트시에선 해고 노동자들의 와이프가 생계를 위해 매춘에 나선다는 보도가 나왔다. 주택 모기지를 갚지 못해 집에서 쫓겨나 싸구려 모텔을 전전하거나 텐트에서 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6년이 지난 올해, 오바마 대통령의 연두교서 연설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성장·고용·소비 등 모든 경제지표가 살아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고소득층 증세를 추진하되 중산층 살리기에 나서겠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연두교서 연설로 중산층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세제 혜택 조항 하나를 없앴기 때문이었다. 이 조항은 미국의 부모들이 자녀 대학 학자금 준비를 위해 금융상품에 투자할 경우 연간 1만4000달러까지 소득공제해주고 투자 수익에 대해 비과세하는 제도다. 이 혜택을 받는 가구의 70%는 연 소득 15만 달러 미만인 중산층이다. 오바마는 여론이 나빠지자 이 조항 폐지 방침을 일주일 만에 철회했다.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 많은 중산층 가정이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주택 모기지를 담보로 2차 모기지를 받는다. 중산층은 세금·의료보험 등에선 많은 부담을 지지만 정부 지원은 적게 받는다. 이런 중산층에 그나마 있던 세금 혜택을 없애려고 했으니 반발하는 게 당연하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연말정산 파동이다. 꼬박꼬박 근로소득세를 내는 중산층 봉급생활자가 가장 열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워런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2004년 『맞벌이의 함정 』이란 책을 펴냈다. 그녀는 과도한 집값과 교육비 부담으로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몰락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워런 교수의 통찰력 있는 경고는 현실화됐다. 문제는 한국의 중산층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3저 호황으로 일자리를 쉽게 잡았던 ‘486세대’가 머지않아 은퇴 시장에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이들은 세금·연금·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면서 내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교육시켰다. 하지만 대부분 노후 대책이 미흡하다. 이 세대가 노인이 됐을 때 과연 다음 세대가 이들의 복지 수요를 감당할 만큼 경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복지체계가 무너지면 현재 중산층의 상당수는 빈곤층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



 연말정산 파동에 이어 이번엔 건강보험 개편 문제가 불거졌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대책을 논의하겠지만 중요한 원칙은 국민에게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상복지’와 ‘증세 없는 복지’는 애초부터 실현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누군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복지 지출구조를 효과적으로 개편하고 유지 가능한 부담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를 묵묵히 지탱해온 중산층은 추락하지 않기 위해 저항의 날갯짓을 시작할 것이다.



정철근 논설위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