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시평] 오바마는 ‘붕괴 이후’를 생각해봤을까

중앙일보 2015.02.02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지난 연말 한국·아랍소사이어티가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개최한 제11차 한·중동 협력포럼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주요 아랍국가의 비중 있는 정치인과 지식인이 대거 참석한 자리다 보니 자연히 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이 화제가 됐다. 거대한 사회혁명으로 아랍 전역에 민주화의 도미노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넘실댔던 ‘아랍의 봄’이지만 묘하게도 현지인들의 평가는 인색했다.



 무엇보다 볼멘소리가 높았던 것은 요르단 참석자들이었다. 시리아가 내전 상태에 돌입하면서 무려 160만 명의 난민이 요르단에 유입됐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200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시리아 난민까지 감당할 재간이 없다는 게 이들의 하소연이었다. 여기에 이슬람국가(IS)의 마수가 요르단까지 번져올 수 있다는 걱정은 말 그대로 전전긍긍 수준이었다.



 사실 ‘아랍의 봄’은 튀니지를 제외하면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집트는 강압적 군사독재로 회귀했고 예멘은 다시 혼돈의 심연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리비아나 아직도 교체 과정이 진행 중인 시리아 모두 최악의 참상을 겪고 있다.



 먼저 리비아를 보자. 미국과 유럽의 지원에 힘입어 2011년 리비아 국민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을 타도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해 출범한 민주정부는 지금까지도 마비 상태에 있고 수도 트리폴리의 일부와 벵가지·미스라타 등 주요 도시는 여전히 반군 수중에 놓여 있다. 중앙 정부는 이슬람 세력, 세속주의 세력, 각 부족 간의 무력충돌에 볼모로 잡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엔에서 파견한 특사가 휴전을 모색하고 있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암살·납치·무장강도 등 폭력사태가 난무하는 저주의 땅. 혁명의 열정이 휩쓸고 지나간 리비아의 현실이다.



 그 와중에 희생된 리비아 국민의 수는 2만5000여 명. 그 밖에도 4000여 명이 실종되고 2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돼 튀니지와 이집트, 유럽을 떠돌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막대한 석유 수입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로 불리던 나라다 보니 추락은 훨씬 끔찍하게 느껴진다. “순박하기 그지없던 리비아 국민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한 리비아인 참석자의 탄식은 더 이상 절박할 수 없었다. ‘실패 국가’의 참혹한 모습이다.



 시리아의 사정은 더욱 긴박하다. 2011년 3월 ‘아랍의 봄’이 번질 때만 하더라도 바샤르 알아사드의 압정이 종식되고 민주정권이 곧 수립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지만 이는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았다. 2012년 7월 15일을 기해 시리아의 정정 불안은 내전으로 번졌다. 외세의 개입으로 현지 상황은 한층 혼미해지고 있다. 알아사드 정권은 아직도 수도 다마스커스와 하마·홈스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지만 알레포 지역은 이슬람과 자유시리아 반군에게, 중부와 동부의 광대한 지역은 IS에, 동북부와 서북부의 끝자락은 쿠르드족에게 내준 상태다.



 내전의 참상은 참으로 끔찍하다. 2014년 12월 현재 시리아 내전은 28만 명의 사망자와 13만 명의 포로 혹은 실종자,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800만 명 이상의 난민을 낳았다. 민주화의 꿈 대신 혼돈과 무기력, 그리고 무고한 주민들의 고통만이 남았다. 이것이 한때 중동 지역의 맹주를 꿈꾸던 시리아의 현주소다. 17세기 유럽의 ‘30년 전쟁’처럼 현 상태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현지 전문가들의 예측은 문자 그대로 저주다.



 결론은 명확하다. ‘외세 개입에 의한 체제 변화’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방한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투르키 빈 파이살 왕자가 필자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민주화나 체제 전복이 반드시 이상적 대안은 아니다. 실패한 국가는 더 큰 재앙이다. 안정 속에서 변화와 개혁의 지혜를 찾아야 한다.” 한마디로 체제 붕괴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튜브 스타 행크 그린과의 백악관 인터뷰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북한 정권이 “잔혹하고 폭압적이며 심지어 주민을 제대로 먹이는 것조차 할 수 없다”며 “시간이 지나면 이런 정권(북한)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적 해결책은 답이 아니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전 방위 경제제재와 인터넷 정보유통의 확산을 통한 북한의 체제 변화를 유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인터넷과 전단 살포로 폐쇄된 북한체제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문제지만 북한을 악마화해 타도에 성공한다 치자. 이후 닥쳐올 혼돈을 미국은 해결할 수 있을까. 체제 붕괴의 파국적 결과를 헤아리지 않는 미국의 대북정책이 두려운 이유다. 아랍에서의 실패를 한반도에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