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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여우가 호랑이로 바뀌는 순간

중앙일보 2015.01.30 00:05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우리는 정말 호랑이일까. 단군 신화 얘기가 아니다. 구순이 된 정치 9단,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오랜만에 그런 화두를 던졌다.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은 호랑이”라고 말했다. “비위를 잘못 건드리면 잘해주던 사육사도 물어버린다”는 부연과 함께. 원로 정치인은 “국민을 위해 일 좀 했다고 알아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고 후배들을 훈계했다.



 맞는 말 같았지만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국민들이 정치인을 물어뜯을 수 있는 맹수라고?



 심오한 화두에 토 다는 게 겸연쩍지만, 정치인 편향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 스스로를 호랑이로 여기는 국민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유치한 연상은 ‘13월의 울화통’으로 별칭이 바뀐 연말정산 파동으로 이어졌다. 그때 우리 머릿속을 스쳐 간 동물이 있었다. 지난 10여 일,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렸을 송나라 고사성어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주인공, 원숭이다. 먹이인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로 줄인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원숭이들은, ‘아침 넷, 저녁 셋’이라는 주인의 수정 제안에 뛸 듯이 기뻐했다는 이야기. 우리가 원숭이였나?



 조삼모사 정책이 원숭이 취급당한 듯한 불쾌감을 폭발시킨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환급 확대와 소급 적용까지 약속했다. 그런데, 이번 파동 때문에 국민을 원숭이에 비유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도토리’를 더 잃은 쪽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더 갖기로 했다가, 눈 깜짝할 새에 다시 토해내게 생겼으니 말 그대로 ‘원숭이 됐다’(개그콘서트 유행어로 ‘우습고 한심한 꼴이 됐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렇듯 호랑이도 원숭이도 미심쩍은 나의 선택은 여우다.



 호랑이의 위엄을 가장하기도 하고, 원숭이처럼 까불대기도 하는, 지혜와 교활함을 대표하는 동물. 정치권 뉴스에 반응하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여우의 행태를 목도한다. 이완구 총리 후보자의 인사 검증 뉴스를 예로 들면 이런 거다. 현재 시가 30억원대 분당 땅 투기 의혹에 대한 ‘여우 국민’들의 첫 반응은 분노가 아니었다. 대신 “나는, 우리 아버지는, 왜 그때 저 땅을 못 샀을까”라고 자책하고 후회한다. 후보자의 지인이자 지지자가, 세 필지로 구성된 네모 반듯한 땅의 한 필지를 잠시 소유했다가 후보자 가족에게 다시 되팔았다는 의혹 보도에도, 다 안다는 듯 ‘흥’하고 코웃음 친다.



 15년간 이어진 인사청문회가 그런 노하우를 가르쳤을 것이다. 여우들은 이런 말도 한다. "제발 낙마까지는 안 가게 해주세요.” 더 이상의 혼란과 실망이 싫기에, 여우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지혜로 누르고 산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납득 안 되는 해명과 뻔뻔한 침묵이 반복되면, 여우는 다시 호랑이로 변할 것 같다. 천하를 호령했던 원로 정치인도 충청권의 정치적 후계자에게 ‘피호봉호’(避狐逢虎·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를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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