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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

중앙일보 2015.01.30 00:05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최근 연말정산 파동을 계기로 우리 정치의 ‘철학적 빈곤’이 바닥까지 드러났다. 문제의 발단인 ‘증세 없는 복지 확대’라는 현 정부의 원칙부터 말이 안 된다. 세금을 더 안 걷고 복지를 늘리려면 빚잔치를 하거나 동해 앞바다에 유전이라도 터져야 할 판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누구한테 무슨 보고를 받았는지 ‘증세 없는 복지 확대’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은 모양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차마 증세란 말도 못하고 조세형평성 강화(소득공제→세액공제 전환)니, 국민건강 증진(담뱃값 인상)이니 하는 민망한 명분으로 세수 확대에 나선 건 보기에도 딱하다.



 여야도 2013년 말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세법개정안을 합의로 통과시킬 때 이게 사실상 증세라는 걸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당시 민주당은 소득세 최고세율 과표구간을 3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낮추자고 줄기차게 요구해 끝내 관철시켰다. 여야의 관심은 증세의 폭이었지 증세라는 전제 자체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랬던 여야가 이번에 연말정산 파문이 터지자 “아니 그게 증세였느냐”며 짐짓 호들갑을 떨고 있다. 새누리당은 뻔뻔하다. 보수정당이면 애초부터 선별적 복지 노선을 추구했어야 하는데 2012년엔 어떻게든 표를 얻으려고 안 어울리는 복지정책으로 치장한 게 화근이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재정문제가 생기니까 남 얘기하듯 “이럴 줄 알았다”며 잽싸게 무상복지 폐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비겁하다. 세액공제는 고소득층이 불리하고 저소득층이 유리한 방식이다. 야당이 입만 열면 주장하는 ‘부자 증세’의 일종이다. 이번 연말정산 개편으로 직격탄을 맞은 계층은 주로 연소득 5500만원 이상이다. 지난해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연말정산 자료를 낸 근로소득자 1635만 명 가운데 연소득 5000만원 이상은 상위 18%다. 4000만원 이상으로 낮춰도 상위 25%다. 세금이 크게 는 사람들은 봉급생활자 가운데 소득상위권이란 얘기다. 새정치연합이 진짜 진보정당이라면 무작정 정부만 때릴 게 아니라 “복지 확대를 위해 소득상위권의 일부 세부담 증가는 불가피하다”는 목소리도 내야 한다.



 새누리당이 불만을 무마하겠다고 발표한 연말정산 소급 적용 방침은 무원칙의 결정판이다. 앞으로 조세 저항이 생길 때마다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건가. 보수정당이 법 원칙을 무너뜨린 것도 한심한 일인데 서민을 위한다는 야당도 거기에 맞장구를 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이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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