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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두리, 43년 전 아버지의 한 풀었다

중앙일보 2015.01.27 00:47 종합 24면 지면보기
차두리
26일 아시안컵 4강전이 열린 시드니의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 낯익은 인물이 보였다. 축구대표팀 수비수 차두리(35·서울)의 아버지 차범근(62) 전 수원 감독이었다. 차 전 감독은 아내 오은미 씨와 함께 귀빈석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차 전 감독은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장외룡 부위원장, 기성용의 부친 기영옥 광주시축구협회장과 나란히 앉아 경기에 눈을 떼지 않았다.


차범근, 72년 이라크전서 PK 실축
그 이후 페널티킥 키커로 안 나서
차두리, 무실점 수비 이끌며 설욕

 차 전 감독에게 아시안컵은 만감이 교차하는 무대다. 1972년 5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출전하며 이 대회 한국선수 최연소 출전기록(만 18세11개월)을 세웠다. 크메르(현 캄보디아)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A매치 데뷔골도 터뜨렸다. 하지만 그에 앞서 A매치 데뷔전으로 치른 이라크와의 조편성 경기는 혹독한 기억을 남겼다. 0-0으로 비긴 뒤 실시한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나서 실축했다. 차 전 감독은 “태국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선수권을 마친 뒤 A대표팀에 합류했다. 선배들이 막내인 나를 지목해 어쩔 수 없이 키커로 나섰는데, 골을 넣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경기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이후 차 전 감독은 단 한 번도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들 차두리가 43년 전 차 감독의 첫 A매치 상대를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났다. 차두리는 조별리그 2차전 쿠웨이트와 경기 이후 3경기 만에 선발 출장했다. 킥오프 10분 전에 경기장에 도착한 차 전 감독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들의 경기를 지켜봤다.



차범근
 아시안컵에서 차두리는 나이를 잊은 활약으로 주목받았다. 지난해 12월 초 K리그 시상식에서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겠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지만, 경기력은 전성기 못지 않았다. 차두리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선정 조별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고, 우즈베키스탄과의 8강전(2-0승)에서는 연장 후반 14분 70m를 질주하며 상대 수비수 두 명을 제친 뒤 손흥민(23·레버쿠젠)의 추가골을 어시스트했다. 경기 후 축구팬들이 ‘차두리는 대표팀 은퇴를 미뤄야 한다’는 내용의 인터넷 서명운동을 벌일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이라크와의 4강전에서 차두리는 수비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였다. 발 빠른 상대 공격수들의 공간 침투 시도를 적절히 봉쇄했고, 여러 차례 몸을 던져 슈팅을 막아냈다. 후반 중반 이후에는 과감한 돌파도 선보였다. 차 전 감독은 하프타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경기에 집중했다. 호주 국경일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를 기념하는 불꽃놀이가 경기장 하늘을 수놓는데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본지 기자에게 잠깐 시간을 허락한 차 전 감독은 “아들과 전날 통화했다. 잘 하라고 격려한 게 전부”라며 말을 아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수비수 아들의 숙명을 아버지도 마음으로나마 공유하는 듯했다.



 차두리의 투혼 넘치는 활약 속에 한국은 이라크를 꺾고 27년 만에 결승에 올랐다. 아버지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시안컵 우승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룰 기회가 열렸다. 아들은 31일 아시안컵 결승전에 나선다. 자신의 은퇴 무대이기도 해 더욱 특별한 경기다. 아버지는 “하고픈 이야기가 많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식사나 한 번 하자”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경기장을 떠났다.



시드니=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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