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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황선홍의 18번, 이젠 이정협

중앙일보 2015.01.27 00:46 종합 24면 지면보기
이정협에게 벼락 출세를 뜻하는 ‘군데렐라(군대+신데렐라)’라는 별명을 지워야 할 것 같다. 이젠 그에게서 황선홍의 향기가 난다. 이정협이 이라크와 준결승전 선제골을 넣은 뒤 포효하는 장면과 황선홍의 2002 한·일 월드컵 폴란드전 당시 모습을 합성했다. [시드니=뉴시스]


이정협(24·상주)이 호주 아시안컵에서 가장 빛나는 별로 떠올랐다. 27년 전 한국을 아시안컵 결승에 올려놓고, 이를 발판 삼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발돋움한 황선홍(47·포항 감독)을 보는 듯 했다.

이정협, 이라크와 4강전 선제골
김영권 골 어시스트까지 원맨쇼
황선홍도 88년 아시안컵서 데뷔골
한국 대표 스트라이커로 성장해



 55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노리는 한국은 26일 호주 시드니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열린 2015 아시안컵 4강전에서 이라크를 2-0으로 물리쳤다. A매치 6경기 연속 무실점 승리를 거둔 한국은 1988년 이후 27년 만에 결승에 올랐다. 한국은 31일 오후 6시(한국시간) 같은 장소에서 호주-아랍에미리트(UAE) 승자와 결승전을 치른다. 역대 아시안컵에서 무실점 전승 우승은 1976년 이란(4승)이 유일하다.



 새내기 공격수 이정협이 또 한 번 고비에서 반짝 빛났다. 지난 17일 호주와 조별리그 3차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린 데 이어 이라크전에서도 만점 활약을 펼쳤다. 전반 20분 김진수(23·호펜하임)가 올린 프리킥을 뛰어오른 뒤 머리로 정확히 받아넣었다. 이정협은 득점 직후 두 팔을 벌리고 환하게 웃으며 TV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 포효했다. 후반 5분에는 김영권(25·광저우 헝다) 추가골을 도왔다. 페널티 박스 위로 높이 뜬 공을 이정협이 가슴으로 받아 김영권에게 떨궈줬고, 김영권이 왼발 하프발리 슈팅으로 연결해 골을 터트렸다. 1골·1도움을 올린 이정협의 원맨쇼에 1만여명의 시드니 교민들은 환호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17일 호주와 조별리그 3차전 이후 3경기 연속 이정협을 선발 명단에 올렸다. 지난해 12월 대표팀 발탁 당시엔 백업요원으로 분류했지만, 기대 이상의 활약에 조연 대신 주연을 맡겼다. 이라크전에서 이정협은 “많이 뛰고 볼을 많이 소유하라”는 슈틸리케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했다. 상대 수비 진영을 폭넓게 오가며 치열하게 몸싸움을 벌였다.



 이정협은 27년 전 한국을 아시안컵 결승으로 이끈 황선홍을 연상시킨다. 황선홍은 건국대 2학년이던 1988년 카타르 아시안컵 대표팀에 발탁됐다. A매치 경력도 없고 엘리트 코스를 밟지도 않은 황선홍이 대표팀에 뽑힌 건 파격이었다. 일본과의 조별리그 경기(2-0승)에서 터뜨린 A매치 데뷔골을 포함해 이 대회에서 2골을 넣은 황선홍은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며 차범근-최순호를 이을 골잡이로 주목받았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황새’ 황선홍은 A매치 103경기에서 50골을 기록해 한국 축구 공격수 계보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황선홍이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 18번은 한국 축구 공격수의 상징이 됐다. 황 감독은 아시안컵 개막 전 “18번은 나를 상징하는 번호이자 가장 아끼는 번호다. 언젠가는 그 18번을 이을 선수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게 이번 아시안컵이면 더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이정협은 황 감독의 눈길을 사로잡은 ‘18번의 후계자’다. 황 감독은 이정협에 대해 “좋은 공격수는 늘 간절해야 한다. 이정협이 그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협은 경기 후 “우연찮게 황 감독님의 그 번호(18번)를 달게 됐다”면서 “대선배님과 비교되는 건 과분하지만, 대를 이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득점 직후 거수 경례 세리머니를 했는지 묻자 “골 넣은 뒤 본부석 쪽을 향해서 했다. 군인이니까 경례 안하면 큰일난다”며 멋쩍게 웃었다.



 한편 경기 전 인터뷰한 선수가 활약한다는 ‘슈틸리케 법칙’은 이날도 이어졌다. 이라크전을 앞두고 기자회견장에 등장한 수비형 미드필더 박주호(28·마인츠)는 악착같은 수비와 협력 플레이로 5경기 연속 무실점 승리에 기여했다. 중앙 수비수 김영권과 곽태휘(34·알 힐랄)도 이라크의 끈질긴 공세를 침착하게 막아냈다. ‘골 안 먹는 골키퍼’ 김진현(28·세레소 오사카)도 차분한 방어로 이번 대회 출전 4경기를 무실점으로 장식했다.



 경기 후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점점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규율도 잘 잡혀간다. 이는 한국 문화의 특징이자 우리만의 강점”이라면서 “27년 만에 결승에 진출한 건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승을 하더라도 한국 축구는 더 발전해야 한다”며 자만심을 경계했다.



시드니=김지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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