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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지방세 십자가' 곧바로 내버린 정종섭 장관

중앙일보 2015.01.27 00:28 종합 29면 지면보기
정종섭 장관의 지방세 관련 발언 보도 뒤 행정자치부가 기자들에게 e메일로 보낸 ‘설명자료’. 1시간 45분 간격으로 배달된 두 문서에 나타난 주민세·자동차세에 대한 행자부의 입장이 180도 다르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학자 출신 장관의 강단 있는 소신인 줄 알았다. “지자체장들도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을 원하지만 선출직이어서 말을 제대로 못하니 힘들어도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25일 보도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지자체 재정난 타개를 위해 지방세 인상에 앞장서겠다는 뜻이다. 그는 “주민세는 모든 주민이 내는 ‘회비’ 성격이므로 이번 인상안을 ‘서민증세’라고는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의 증세 방안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청와대 문고리만 바라보는 복지부동·유명무실 장관이 많은 탓에 ‘총대 메겠다’는 태도 자체는 반가웠다.



 이날 저녁 행자부는 ‘장기간 변동 없이 유지돼 온 주민세·자동차세 등의 현실화는 늘어나는 복지 재원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문구가 든 보도자료를 내며 장관 발언 취지를 설명했다. 이쯤 되면 ‘확신’이라 볼 만했다. 담뱃세 인상과 연말정산 문제로 증세 논란이 한창인 때라 ‘용기’라 칭할 만도 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두 번째 보도자료가 e메일로 날아왔다. ‘작년에는 복지수요 증가 등 지방재정 여건 악화됨에 따라 자치단체의 오랜 요청을 반영하여 주민세 및 자동차세 현실화 방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나 올해는 자치단체의 강한 요구와 국회의 협조가 없는 이상 지방세법 개정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적혀 있었다. 인터뷰 발언이 보도된 지 정확히 12시간 만에 ‘지방세 인상을 추진하지 않겠다’로 180도 입장이 바뀐 것이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청와대나 여당으로부터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면박당했을 수도 있고 스스로 ‘이럴 때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정 장관과 행자부가 갈팡질팡하면서 조세 불신은 더욱 커졌다. SNS에는 ‘주민세가 ‘회비’라면 나는 안 내고 탈퇴하겠다’ 등의 비난 글이 퍼졌다. ‘증세인 듯 증세 아닌 증세 같은 너’라는 조롱도 있다.



 주민세는 한 지자체 내의 모든 주민이 같은 금액을 내는 인두(人頭)세다. ‘능력에 비례해 낸다’는 조세 형평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도입 때부터 논란이 됐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에서는 주거지의 금전적 가치에 따라 주민세를 달리 매긴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는 1989년 인두세를 도입했다가 폭동을 동반한 조세 저항에 부닥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금, 특히 역진(逆進) 효과를 내는 세금의 도입이나 인상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지자체·정부 모두 재정난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증세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국민에게 솔직히 고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먼저다. 정 장관처럼 정부가 오락가락하면 국민의 마음은 더욱 닫혀버린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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