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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기자의 미장원 수다] 멀어지는 40대 남편, 그리고 성자가 되는 그의 아내

중앙일보 2015.01.26 10:20
[일러스트=강일구]
따르르릉-.



비가 주륵주륵 오던 어느날 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여보세요?"



"나야-."



고교 동창이었습니다. 소울 메이트급의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해 두 딸을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는 친구(여자)입니다.



"너, 밖이야?"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전화로 빗소리가 들리는데...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휴우-. 내가 왜 이렇게 사는 지 모르겠다."



초등학생, 유치원생 딸 둘을 키우느라 밤시간엔 두문불출하던 친구의 갑작스런 전화. 게다가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빗소리는 그녀가 길가 어딘가를 헤메고 있다는 걸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철썩.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 들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이후로 터져나온 친구의 고백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결혼 후 10년 넘게 한 치의 흠을 잡을 수 없을만큼 다정하고 가까웠던 남편이 갑자기 멀어졌다는 겁니다. 갑작스런 술자리도 많아지고 자기한테는 회식이라고 해놓고는 다른 모임에 가기도 했답니다. 그러려니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사실을 안 아내는 화가 나고.. 뭐 이런 스토리입니다.



40대 남편의 멀어짐. 이 이야기는 비단 이 친구 한 명의 고민이 아닙니다. 제 주변의 많은 '아내'들이 40대 남편의 멀어짐을 저에게 토로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특히나 가정적이고 부부사이에 대화를 많이 나눴던 '친구'같았던 남편이라면 의아함과 고민의 수위는 더 깊어집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멀어짐은 지극히 '정상'이랍니다. 남자가 40대가 되면 지금껏 달려온 시간에서 갑자기 멈춰서서 한 템포 쉬는 시간이 온다고 합니다. 남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커지고 지금까지 지켜온 가족과 책임에서 좀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뭐 이런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은 마음에 한눈도 팔고 싶어하고 애써(!)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으로 돌기도 하는거죠.



사회심리학자 최창호 박사는 40대 남편들이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다'라고 느끼며 '상승 정지 증후군'을 겪는다고 하더군요. 상승 정지 증후군이란 말 그대로 이제 더이상 올라가지 않는 상태에서 오는 반응을 말합니다. 중년 남성은 사회적 측면, 인간관계 등에서 모두 이미 정상을 한번 찍은 상태로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이는 우울한 상태가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 외롭고 우울하고 뭐 그런 상태가 오는 겁니다. 의무에서 벗어나 남성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권리와 즐거움에 대한 질문과 갈증이 증폭되는 거죠. 그러니 의무만 있는 집(가족)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나오는 겁니다.



'그럼 나는?' 당연히 이 말이 함께 아내들 입에서 나오죠. 그런데 어쩔 수 없답니다. 이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려 줘야 한답니다.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 나온 '동굴에서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거죠.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이런 남자들이 그렇다고 결코 밖으로 엇나가지는 않는 답니다.(물론 100%라고 믿진 않습니다만)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다가 다시 자신의 것(=가족)으로 돌아온답니다. 일종의 방황기, 사춘기인 셈이죠.



40대 남편의 멀어짐에 대처하는 방법은 뭘까요. 심리학자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그런 남편들을 성자와 맞먹는 인내심으로 허벅지를 찌르며 기다려 주는 거랍니다. 물론 가정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화난다고 '벽끝까지 몰아 붙이기'나 '맞방황'으로 대처했다가는 나중에 침묵시위나 '여자는 그러면 안되지'라는 억지 신공을 펼치는 남편에게 오히려 된통 당할지도 모릅니다.



아직 싱글인 저에게 선택하라고 한다면, 일단은 기다려주기를 선택하겠습니다. 인간으로서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좀 풀어놔주는 게 좋을 것같습니다. 속에서 불은 나겠지만요. 왜 그래야 하냐고요? 감히 말하건데 세상에 인연을 찾기란 너무 힘들거든요. "세상에 별 남자 없다"라고 흔히들 말하면서 정작 그 기준이 '내 남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남성 직장 동료에게는 후한 여자들이 내 남편의 고민과 갈등에는 인색합니다. 앞으로 혼자 살 생각이 아니라면, 일단 맺은 인연이니 좀 참아봐주자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얼마전 『남자의 밥상』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40대 남자가 먹지 말아야 하거나 먹어야 할 음식에 관한 책입니다. '미운 놈 떡하나 더 준다'란 마음으로 남자 몸에 좋다는 음식을 준비해서 내 남편을 기다리는 성자의 여유. 한번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윤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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