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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중앙일보 2015.01.26 00:05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형구
JTBC 정치부 차장대우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드나들며 엉뚱한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매년 세비를 받는 의원들의 활약상을 프로 경기 선수처럼 연봉 고과로 매겨 본다면…’.



 프로 종목 가운데 연봉협상이 깔끔한 편에 속한 게 프로야구다. 선수들 몸값은 흘린 땀에 비례한 기록이 모든 걸 말해 준다. 타자라면 홈런·타점·타율 등 타격 능력이, 투수라면 승수와 평균 자책점 등 객관적인 기록이 고과표로 쓰인다.



 팀 공헌도 같은 정성지표까지 계량화해 나타난다. 같은 홈런이라도 승부를 가르는 끝내기 홈런이냐, 필요할 때 터진 쐐기포냐, 승부가 이미 결정된 뒤 터진 뜬금포냐 등에 따라 순도가 달라진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기록으로 평가해 보면 어떨까 하는 발상은 최근 정치권 이슈마다 맹위를 떨친 ‘속기록의 힘’을 보면서 더해졌다.



 월급쟁이들이 분통을 터뜨린 연말정산 파동. 이 대란의 직접적 원인이 된 소득세법 개정안은 2013년 말 국회 처리 과정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담은 속기록을 통해 민낯이 드러났다. 2013년 12월 24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 속기록을 옮겨 본다.



 ▶박원석(정의당) 위원=“정부가 얼마나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왔느냐 하면 세금 증가를 흡수하려고 근로소득 세액공제로 확대하는 안을 만들어 왔어요. 그런데 확대안을 보면 되게 웃깁니다.”



 ▶나성린(새누리당) 소위원장=“박 위원. 왜 그런 지저분한 안이 나온 줄 알지요? (중략) 자, 이거 이렇게 정리합시다. 대강 알았잖아요. 이것은 나중에 ‘바깥’에서 하기로 합시다.”



 회의 도중 ‘바깥’이라는 건 발언을 기록하는 속기사가 없는 공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의원들만의 ‘사인’이다. 골치 아픈 문제는 바깥에서 정치적으로 풀자는….



 어린이집 폭행사건 이후 정치권이 대책이라고 내놓은 ‘CCTV 설치 의무화’ 법안 역시 국회 속기록이 의원들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이미 2013년 어린이집 폐쇄회로TV(CCTV) 설치를 강제하는 법안이 제출됐는데,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제동 걸린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그해 6월 당시 법안소위 회의록은 “부작용이 클 것이다” “보육교사 인권도 중요하다” “감시체제에서는 애착관계 형성이 어렵다” 등 빗발쳤던 ‘CCTV 불가론’을 기록한다. 속기록이 의원들에겐 일종의 CCTV 역할을 한 셈이다.



 여야 의원들은 관행적으로 상임위 소위원회를 ‘비공개’로 한다. 하지만 속기록을 남겨 두면 적어도 발뺌은 못하게 된다. 애초에 소위원회까지 모두 공개해 입법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많지만 의원들한테는 쇠귀에 경읽기다. 공개의 불편함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공개에 계속 노이로제 반응을 보였다간 의정활동을 낱낱이 기록으로 남겨 점수화하자는 생각이 기자 개인만의 상상으로 끝나지 않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김형구 JTBC 정치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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