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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노숙하며 500여 명과 대화 … 부부상담가로 새삶 찾았죠

중앙일보 2015.01.21 00:36 종합 23면 지면보기
김태현 소장(오른쪽)이 오랜만에 서울역에서 노숙인 친구들을 만났다. 그는 가끔 그들을 보러 서울역을 찾는다고 한다. 김 소장은 “2008년 이후 중산층 출신 노숙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안성식 기자]


두마음 행복연구소 김태현(50) 소장에게 서울역은 제2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도 5년 전까지 그곳에서 노숙을 했다.

김태현 두마음 행복연구소장
무역업자서 떠돌이 노숙인 전락
옷·세면도구 얻어준 건 ‘친구들’
복지관 컴퓨터로 정책 비판 글 써
"마음이 더 아픈 노숙인 보듬어야"



 잘 나가던 부산의 무역업자였던 김 소장은 1998년 봄 야반도주했다. 대출이자가 환란 때문에 감당 못할 수준으로 불어나서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호주 대기업의 납품 계약도 다른 회사에 빼앗겼다.



 평택으로, 여수로 옮기면서 몇 번 재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006년 돈이 다 떨어졌다. 나흘간 한 끼도 먹지 못했다. 김 소장은 “자존심 때문에 무료 급식소는 도저히 갈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 배고파 자존심은 점점 스러졌다”고 회상했다. 결국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졌다. 그리고 여수역의 노숙인이 됐다. 그나마 자존심이 남았기 때문인지 양복은 계속 입고다녔다. 그 양복은 몇 달 후 다 해어졌다. 그는 “양복은 (멀쩡한 생활인이었던) 나를 증명하는 존재였다. 양복을 버려야만 했을 때 마음이 아파 술을 진탕 마셨다”고 말했다.



 그에게 도움을 준 건 동료 노숙인들이었다. 그들은 의류 수거함에서 신발과 옷가지를, 대중목욕탕 쓰레기통에선 세면도구를 얻을 수 있다는 ‘생활상식’을 알려줬다. “노숙인끼린 담배 한 가치에, 술 한 잔에 바로 친구가 된다. 어떻게 보면 아주 순수하다”고 말했다. 2008년 거처를 서울역으로 옮겼다. 더 ‘풍족한(?)’ 노숙생활을 위해서였다.



 김 소장에 따르면 서울에서만 매년 노숙인 300명이 사라진다. 원인은 병사(病死). 그는 “요즘 정부와 단체의 지원 때문에 노숙인의 기본적 의식주는 해결됐다. 그러나 마음속 응어리는 치유가 안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금만 아파도 삶의 의지를 놓아 쉽게 죽음으로 이른다는 게 김 소장의 설명이다.



 김 소장은 세상에 노숙인의 현실을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2008년 사회복지관 컴퓨터를 사용해 다음 아고라 경제방에 ‘비즈링크’라는 아이디로 글을 올렸다. 처음엔 무역업 경험을 더듬어가며 당시 정부의 환율정책을 비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점차 노숙에 대한 글을 더 많이 썼다. 팬들이 서울역으로 그를 만나러 오기 시작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팬들은 2008년 첫 모임을 열었다. 멀리 독일 뒤셀도르프에서도 그를 보러 왔다고 한다. 그와 팬들은 설과 추석에 노숙인들에게 떡국을 나눠주는 행사도 열었다. 김 소장은 노숙인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됐다. 그는 “노숙인은 표가 안 되기 때문인지 정치권의 관심이 적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2010년 5년 만에 노숙생활을 청산했다. “내 응어리는 모두 풀어졌다. 대오각성은 아니고 서서히 덤덤해졌다. 인생에 대해 참회했다. 모든 게 내 책임이고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지난해 11월 『아내 좀 나눠줘』를 냈다. 진화심리학 관점에서 남녀의 성(性)·결혼·사랑 문제를 풀어 쓴 책이다. 진화심리학은 책과 논문을 통해 공부했다. 사례들은 그가 직접 다뤘던 상담내용들이었다. 김 소장은 “노숙인 시절부터 500명 넘게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상담했다. e메일 상담은 부지기수”라며 “대부분 부부관계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했다. 아예 ‘두마음 행복연구소’를 차렸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라 두 마음이고, 서로 차이를 알아가는 사이라는 뜻”이란다. 김 소장은 “책이 많이 팔려 노숙인들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는 클리닉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글=이철재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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